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는 누구인가

유공희 선생님을 말한다 / 이이화

운수재 2007. 11. 6. 10:18

 

유공희 선생님을 말한다

                                                                                                                       이 이 화

 

1950년대 광주고등학교에서는 새 교사가 부임하면 조회시간에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교장의 소개말과 함께 새로 온 교사의 인사말을 듣게 하였다. 필자는 어느 봄날, 정확하게 말하면 1956년도 새 학기에 유공희 선생님의 부임 인사말을 들었다. 유공희 선생님과 나와의 기묘한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첫 인상은 잘 생긴 용모에 키도 늘씬하였고 투박한 안경을 쓰셔서 그리 호락하게 접근할 인물이 아니었다. 인사말의 구변도 좋았다. 유 선생님은 국어(현대문) 교사였으니 어설프나마 한참 문학에 열중하던 나로서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선생님의 강의는 수사(修辭)가 화려했고 아주 현학적(衒學的)이었다. 국어 교과서는 손에 들려 있었으나 거의 텍스트로 사용하지 않았다. 교과서의 어느 한 대목을 독해하다가 얘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 종칠 때가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주로 서양 근대문학을 많이 얘기했는데 랭보나 보들레르 등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던 것 같고 현대의 경향도 곁들였다. 때로는 일본 유학시절의 낭만도 소개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학생들은 선생님의 강의에 매료되었다. 그의 강의를 다 알아듣는 수준은 아니지만 아무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심취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선생님과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당시 선생님은 학교 앞의 관사에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나는 가끔 선생님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 때로는 내기 쓴 글을 드리면서 평을 듣기도 했다. 아마 개인 지도를 받는 시간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선생님 외모와는 대조적인 작달막한 체구의 사모님은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시어 마음이 편했다.

 

선생님께서 3학년 세계사반을 담임하였을 때 나는 그 반에 들었다. 그런데 이때 나의 복잡한 신상이 선생님께 알알이 다 드러나고 말았다. 나는 고아가 아니었지만 고아라는 명목으로 학비를 면제받았으나 사친회비만은 내야했다. 나는 입학할 적에도 입학금은 어찌어찌 마련했으나 교과서 살 돈이 없어서 교감 선생께 상급 성적을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교과서 없이 학교를 다녔다. 영어 수학 등 두세 교과서만 사고… 아마 내가 학교 전체에서 교과서 없이 수업을 받은 유일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이런 나의 처지를 선생님은 모조리 알게 된 것이다. 당시 교무실에서는 자주 학비 수납을 담임교사에게 독려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담임교사는 자기 담당 반에서 학비를 내지 않은 학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독촉하여 해당 학생을 난처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납입금을 빨리 내라고만 하셨지 한 번도 개개인의 이름을 호명한 적이 없었다.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는 배려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선생님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용케도 선생님의 거처를 알아냈다. 선생님은 서울로 전근을 와서 서울고등학교에서 봉직하였다. 당시 선생님의 거주지는 신촌 인근에 있었는데 명동에 소재한 사설학원의 과외 강사로도 나가셨다. 나는 때로는 댁으로 때로는 학원으로도 찾아갔다.

그러면 선생님은 강의가 끝날 때가지 기다리게 해놓고 술집으로 데려가 술과 안주를 듬뿍 사주셨다. 가끔은 댁으로 찾아가서 술과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언젠가 댁으로 찾아갔을 적의 일이었다. 굶주린 속에다 술만 실컷 마셔 곤드레가 되어서 사모님이 잘 깔아준 이부자리에다가 그만 ‘오바이트’를 하고 말았다. 새벽에 깨어나 이를 보고서는 난처해서 토물을 그대로 둔 채 도주를 한 적도 있었다.

 

아무튼 선생님과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문학 얘기가 주된 화제였지만 한국학 관련의 얘기를 주제로 삼기도 했다. 이때 나는 선생님이 서양문학에만 학식이 높은 것이 아니라 동양 곧 중국의 당시에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평안(評眼)이 있음을 알았다. 더욱이 내가 한문에 소양이 다소 있음을 안 선생님은, 내가 한국사를 공부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칭찬을 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새벽 도주를 한 뒤 나는 한동안 선생님을 찾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면서 술에 찌들기도 하고 틈나면 한국사 관련의 책을 자득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기도 했지만, 예전과는 달리 술값이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중동학교를 그만 두시고 대성학원에 나가실 때 종로 뒷골목에서 자주 마주쳤다. 이때도 예전만은 못했지만 가끔 술잔을 마주 대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한국사 관련의 글을 더러 발표하기도 하고 티브이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모님이 티브이를 보시면서 내 얼굴이 나오면 ‘이화 학생’ 나왔다고 소리친다는 말씀을 전해 주셨다. 관심을 계속 기우려 주심으로 격려를 보내신 것 같다. 선생님이 대성학원 강의를 그만 두신 뒤에는 거의 만나 뵈올 기회가 없었다.

 

그러했지만 나의 저술이 나오거나 하는 경우에는 선생님 생각이 났고 선생님의 동서가 나와 한 아파트에 살 적에는 그를 통해 소식을 들어 큰아드님 결혼식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그러나 자주 만날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암으로 투병하신다는 소식을 풍문에 듣고 송규호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처를 알아내 선생님 댁을 방문할 수 있었다.

 

송규호 선생님을 모시고 오병선 강홍기 필자 넷이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선생님의 입담은 여전했으나 변기를 몸에 차고 다니면서 투병하는 중이셨다. 사실 우리 일행은 선생님이 작고하시기 전에 문집을 간행해 드리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셨다. ‘내 죽은 뒤에 내는 것은 모르지만 살아서는 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우리는 더 설득할 수 없어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곧 작고하셨다. 선생님의 빈소는 초라하다면 초라했다. 선생님을 따르던 그 많은 제자들에게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을 추모하는 제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오늘날 사도(師道)가 사라졌다고도 하고 스승을 존경할 줄 모른다고 하기도 한다. 이런 현실에서 새삼 선생님을 떠올려 본다.

 

선생님은 학과를 열성적으로 가르쳐 일류 대학에 진학시키는 교사가 아니었다. 그저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을 이야기하고 인성을 기르고자 했다. 때로는 교사로서 너무 권위를 외면하는 자유로운 풍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나도 이런저런 연유로 제자들을 두고 있으면서 가끔 선생님의 그런 풍모를 떠올리곤 한다.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