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담]
“議員님! 一目瞭然이란 말을 정녕 모르십니까?”
吳 炳 善
내가 光州高 7회 졸업한 것이 내게는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당시 光高에는 광주, 목포, 여수, 순천 등을 위시해서 전남의 읍면 소재지 중학교에서 내로다 하는 학생들이 입학하였습니다. 그런 연유인지 하나같이 매우 똑똑하면서도 순박하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라이벌이면서 동시에 격려자로서 풋풋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고, 지금까지 잘 가꾸어 와서 좋은 친구로 남아 늘그막인 지금도 자주 모여 희로애락을 함께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행운의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훌륭하신 여러 선생님들의 좋은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 우리 광고에는 張俊翰 교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훌륭하신 선생님이 많으셨지만, 내게 가장 깊은 영향력을 주신 분은 국어과 柳孔熙 선생님이셨습니다.
유 선생님은 우리를 입학에서 졸업까지 내리 3년간을 가르치셨는데, 수업시간이 지루하기는커녕 기다리게 하는 멋진 유머와 위트를 구사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강의 중 많은 일화를 곁들이셨는데, 당시 들은 것 중 기억에 생생한 것을 하나 적어봅니다.
일본 外相을 지낸 ‘이누 가이’는 한쪽 눈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국회에서 “국제정세를 살펴보니”하며 말을 이어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한 야당의원이 시비를 걸고 나섰습니다.
“외상! 당신은 눈이 한 쪽밖에 없질 않소?”
“그렇습니다만.”
“한 쪽 눈만 가지고 복잡한 국제정세를 어찌 잘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누 가이’는 슬쩍 웃으며 태연히
“의원님! 의원께선 진정 일목요연이란 말을 모르십니까?”
강의를 듣던 우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워했습니다. 선생님은 ‘일목요연’이란 대목에서 구두 뒤꿈치를 약간 올리시고 음정을 한 옥타브 높이시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갈색 뿔테 안경 너머로 내려다보셨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멋스러운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문학, 역사, 철학, 인생을 논하셨고 그 영향으로 우리는 도서관인 世宗舘에서 문학과 철학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선생님 강의는 누에에서 명주실이 풀려나오듯이 술술 이어졌으니 완전히 자기 것으로 녹아난 소재들을 자유자재로 가르치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권력, 재물, 명예, 지위보다 인간의 가치와 영혼의 소중함을 일러주셨습니다. 당시 수많은 작품에 대하여 해설해 주시거나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 모파쌍의 「목걸이」, 고골리의 「검찰관」, 괴테의 『西東詩集』, 林語堂의 『生活의 發見』등이 특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은 교과서 내용을 소홀히 하시지도 않은 것 같으니 그 조화 솜씨가 대단한 것이지요. 우선 우리들에게 재미를 느끼게 하고 강의에 집중토록 하게 하는 힘을 가지신 것이겠지요.
처음 밝히는 것이지만, 나는 초등학교 5~6학년 시절부터 장래 국무총리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헌법은 대통령 중심제에 의원내각제 요소를 많이 담고 있는데 국무총리 제도도 그런 산물의 하나이지요. 당시는 어린이들에게 장래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대답하는 애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나는 어쩌자고 국무총리가 되겠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최고 다음자리가 되고 싶었나 봅니다.
내 야무진 꿈은 고등학교 1~2학년 때 잠시 흔들렸습니다. 문학과에 들어가 좋은 작품을 써보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었으니 아마도 감수성 많은 시절, 좋아하는 유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그러나 잠시 흔들려 좋은 작품을 써보겠다는 내 허황된 꿈은 함께 문예반 활동을 하던 林步 강홍기 형의 창의성을 보고 턱도 없는 꿈이구나 스스로 깨닫고 고3때부터는 본래 목표대로 법대 준비에 몰두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법대에 들어가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 변호사로 활동하며 나름대로 사회정의 실현에 노력했고, 5남매나 되는 자녀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으니 그때 내 능력의 한계를 말없이 깨우쳐준 林步 형에게 감사할 일인 것 같습니다.
졸업 후 내가 선생님을 처음 찾아 뵌 것은 많은 세월이 흐른 1999년 가을 경으로 기억됩니다. 고교시절 문예반에서 함께 활동하던 친구 중 『이야기 한국사』란 방대한 역사물을 발간하고 민중문제에 관심을 갖던 유명한 재야 사학자 五集 李離和 형이랑, 서울대 국문과 재학 중 현대문학을 통해 화려하게 등단한 유명한 시인이자 충북대 국문과 교수인 문학박사 林步 姜洪基 형이랑, 나랑 셋이서 역촌동 선생님 댁을 찾아갔습니다.
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사모님을 잃으시고 홀로 사시고 계셨는데 저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하다가 인근 조그만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지요. 방광암을 앓고 계시고 소변 통을 달고 있어서 멀리 나들이 하기는 어렵다는 선생님의 사정 때문이었지요. 술이 몇 순배 돌아가는 동안 선생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는데 여전히 여유롭게 세상사를 바라보시며 넉넉한 마음을 지니시고, 말씀에 번득이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기는 옛날이나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 후 나도 유사한 질병에 시달린 바 있는데 당시 달관한 선생님의 모습은 내 질병을 이기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신촌 세브란스 병원의 선생님 영정 앞에 섰으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많은 가르침과 사랑을 받고도 연락도 못 드리고, 즐기시는 술 한번 대접해 드리지 못한 못난 내가 못내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변호사,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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