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좋은 여자, 좋은 시 / 최상호

운수재 2007. 11. 12. 00:09

 

 

좋은 여자, 좋은 시

최 상 호(시인)

 

저는 참 늦게 시를 쓰기 시작한 편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단에 서게 된 뒤, 시골 학교 교사로서의 애환과 교육 현실의 고뇌, 아픔을 뭔가로 표출하지 않을 수 없어서 끄적거리게 된 것이 시였으니까요. 그때의 생각으로는 교사니까 당연히 교육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래서 어느 교육계 문학지에 글을 낸 것이 등단의 시작이었습니다. 나이도 벌써 서른 중반이 되었구요. 그러나 시를 가장 절실한 감정으로 토해 내고 손재주에 의존하지 않았던 시절은 오히려 그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시 한 줄은 바로 한 굽이의 삶이요, 의지 그 자체였으니까요. 추호도 의식의 과장이나 장난을 일삼지 않으려고 했고 ‘시 따로 행동 따로’ 의 교직 생활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초발심이 그립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 동안 20여 년이 훌쩍 넘도록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저는 늘 제가 가르치던 수업 방식이 최고로 정도(正道)이며 괜찮은 수업인 것으로 자긍하며 지내왔습니다. 기왕의 수업 틀에 조금씩의 살을 붙이고, 정보화 시대이니만큼 요즘 유행하는 I.C.T. 관련 기자재나 몇 가지 구색을 맞춰 끌어다 대고는 편안히 살아왔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지요. 그러다 어느 날인가 내심에는 늘 장사꾼들이라고 외면해 오던 세칭 학원 강사들의 수업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피 튀기는(?) 현장, 강한 자만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정글에서 승리하기 위해 고안되고 시행되는 수 없이 많은 교육 아이디어에 엄청난 쇼크를 받았던 겁니다. 고깔을 쓰거나, 머리에 색색의 염색을 들인다든지 분필을 한 주먹씩 쥐고 부러뜨리며 괴성을 지르면서 온갖 이벤트로 수업을 진행하는 강사들에게 학생들은 관심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방적으로 던져 준다는 것과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제 수업은 물론이고,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의 열정과 진정성에 대해서도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제 이와 관련하여 시를 쓰면서 느낀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시인으로서 자기가 쓴 시를 남들이 읽고 공감해 준다는 것은 솔직히 큰 기쁨임은 부인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인들은 시를 세상에 내놓을 때 과연 얼마나 그 형식에 대해서, 내용에 대해서 새로운 실험정신으로 도전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구요. 과연 얼마만큼이나 치열하게,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독자들의 마음에 파고들기 위해 시어를 조탁하고 정서를 가꾸고 다듬었는가, 학원 강사들의 수업처럼 정말 죽기 살기로 했었나, 이런 것 말입니다. 제 경우로만 고백한다면 정말이지 아니었습니다. 너무 안일하였고 너무 보수적이었고 노력이 부족하였습니다. 은근히 남의 평가를 신경 쓰면서도 작품은 던져질 뿐이고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거나, 나는 타인의 평을 의식하지 않노라고 내세우며 스스로의 게으름을 호도(糊塗)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박희진 시인의 1행시, 17자시, 4행시에 대한 꾸준한 개척이나, 또 임보 시인의 四短詩 실험 그리고 구도적 자세마저 느껴지는 이생진 시인의 끝없는 섬 탐방과 詩化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것 같습니다. )

요즘의 신세대 대중가요 가수들의 경우를 예로 들며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기성세대의 눈으로 몇몇 히트 작품을 분석해 보면 사실 그 노랫말은 유치하고 단순합니다. 서정적이지도 않고 비유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가사가 단순하고 감정이 단도직입적 표출이라 할지라도 톡톡 튀는 리듬과 현란한 춤 솜씨가 있으니 그 노래가 살아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도 비록 그 주제의식이 좀 빈약하더라도 내용을 형상화하는 이미지가 돋보이고, 새로운 감각의 리듬이 있으면 독자들의 마음을 끌 수도 있다고 봅니다. (유행가도 사실 첫정은 가사보다 곡에서 결정나잖아요. 리듬이 일단 흥겹거나 재미있다든지 또 유난히 애상적이거나 하면 끌리거든요.) 제가 드릴 말씀의 요지는, 시가 오늘날의 다양화된 독자들에게 좀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을 수 있습니다. 흔히 연애할 때 좋은 여자와, 결혼했을 때 좋은 여자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연애할 때 어울리는 여자가 일시적 관계로 끝나는 것처럼, 재미있고 그럴 듯하나 깊이가 없는 시는 우리의 삶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고 영혼을 윤택하게 해 주지도 못하지요. 그러나 ‘연애할 때 좋은 여자’ 정도의 시라도 되어서 피곤한 많은 사람들에게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즐거움과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괜찮은 것 아닌가요?

기왕 여성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이제 ‘좋은 여자’에 대해 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여자’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쉽다 할지라도 ‘좋은 여자’에 대한 개념 정리는 무척이나 난감합니다. 좋은 여자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너무 다르고 주관적 판단의 기준이 너무도 결정적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더없이 예쁘다고 느끼는 여자를 다른 사람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여기거나, 저런 성격의 여자와 평생을 어떻게 사나 하는 마음이 들 정도의 여인에게도 묘한 매력을 찾아 끈끈하게 얽히는 부부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곤혹스런 점을 바탕에 깔고라도 일단 ‘좋은 여자’의 개념을, 성격이 원만하고 일정한 정도의 지식과 교양이 있어야 하며 얼굴은 밉지 않을 만큼은 되어야 한다. 라는 일반적 기준은 내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기준으로 또 얼마든지 보편적 판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여간 이렇게 공통의 수긍점을 가질 수 있는 접근이 가능하다면 이 점은 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즉, ‘좋은 시’는 일차적으로 시의 기본적 구성 요소인 운율(음악적 요소)이 있어야 하고, 주제(의미적 요소)가 내재되어야 하고 이미지(회화적 요소)가 형상화되어야 할 것 따위 말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다음에라야 여러 변용도 가능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근자에 쏟아져 나오는 적지 않은 시 작품들에는 이런 요소들이 한꺼번에 무시되고 파괴되고 있으며, 거기 더하여 정서적 요소까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실험정신도 아니고 개성도 아니며, 그저 얼치기 전위 모방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남들이 보기에는 기본이 안 되어 있으며 전혀 '아니올시다'인 여자를 ‘최고의 신부감’으로 칭찬하고 내세우는 중매쟁이가 현실에 있듯이, 정말 기본도 갖추지 못한 시를 ‘읽다 보면 좋아지는 작품’이라고 칭찬하며 억지를 쓰는 평자도 우리 문단에는 더러 있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자기 타입에 딱 맞는 여자를 택해 함께 사는 거야 누가 말리겠습니까만 남들에게도 내 여자가 최고란 걸 인정해 달라며 강요하는 데에는 질색할 노릇입니다. 시대마다 미인상이 다르고 중시되는 요소가 달랐지만 미인이 가지는 보편타당한 일정한 기준은 언제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목이 기형적으로 길수록 미인이라거나 아랫입술이 두꺼울수록 좋은 여인으로 취급받는 건 아프리카 외의 일반 문명사회에서는 드문 일이지요. '좋은 여자'는 한눈에 척 보아서 벌써 맘에 들고 몇 마디 말에서 느낌이 오듯이, '좋은 시' 역시 남들의 특별한 해석이 없이도 좋은 시라야 한다고 봅니다. 너무 어려워서 전문가가 거듭 거듭 전문적인 해석을 하고 분칠을 한 뒤 이러이러하게 봐달라고 해야만 겨우 '그렇게도 볼 수도 있겠네요'라는 정도의 반응을 얻는 시라면 이미 실패한 시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관된 실험정신의 산물로 나타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대개의 경우에는 자기가 쓴 내용을 자기도 뭔지 모르게 모호하게 얼버무려 평론가에게나 맡기는 지적 사기꾼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시를 평하는 분들의 체면을 깎을 목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저 ‘좋은 여자’와 같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우리 시인들의 자세를 한번 되돌아보려는 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중언부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성의 비유로 몇 마디 더 해 보겠습니다. ‘좋은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남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어야 하고 자기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머리를 묶었다가 저렇게 잘라도 보고 때로는 빨간 구두를 신었다가 때로는 모자를 쓰기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후각적 이미지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강렬한 유혹의 향수도 마다하지 않고, 목소리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겠구요.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또렷해야 함은 비단 유교문명권하의 남성들의 독점적 평가지표만은 아닐 테지요. 분명한 발음과 억양 있는 목소리로 말해야 하고 반듯하고 예리한 안목과 식견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재치 있고 깊은 울림이 있는 말솜씨는 부단한 지적 단련에서 나오는 것인데, 반짝 아이디어에 매달려서는 오래 가지 못하겠지요. 그리고 모임마다 웃음을 유발한다 할지라도 매번 그런 수준만 보여 주는 여성이라면 그저 그렇고 그런 여자, 그냥 재미나 있는 여자쯤의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고, 또 그 자신도 곧 말의 밑천이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시도 이와 꼭 같은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탄탄한 기본기와 함께 그 나름의 개성과 감동이 있는 시라야 합니다. 가까이하여 감동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시를 오늘날처럼 재미난 일투성이의 세상에서 굳이 시간 낭비하며 함께 할 독자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물질 영역뿐만 아니라 정신 영역에까지도 그 물결은 밀려오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우리가 외경의 마음으로 바라보던 예술도 여지없이 공격당하여 대중의 눈높이로 끌려오거나 변신하여 새로운 색깔로 다가서는 시대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시의 영역은 그래도 아직까지는 태풍 너머의 성곽처럼 고집스레 그 위엄을 고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앞으로는 시가 어느 곳으로 어떻게 끌려 내려올지 짐작키 어렵습니다. 다만,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로봇 인간과 함께 가족을 이루어 사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인간의 가슴을 지닌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 때에도 시는 여전히 그 역할을 다 할 것이란 점입니다.

                                                                                                    (우이시 제19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