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한담(漢詩閑談)

여류시인 황진이 / 조영님

운수재 2007. 11. 16. 06:27

 

 

여류시인―황진이   / 조 영 님

 

 

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紅顔은 어디 두고 白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위의 시조는 천재 시인이요, 호남아인 白湖 林悌가 황진이의 무덤 앞에서 지은 노래이다. 평안도사로 임명되어 행차하는 도중에 황진이를 찾아갔으나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되고 없는지라 이와 같은 시조 한 수 읊고 제사까지 지냈다가 파면당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임제가 평생 황진이를 만나지 못하여 늘 가슴으로 사모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찌되었든 황진이는 살아 생전에 혹은 죽어서까지 이렇듯 남성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받은 여인이었다. 그녀와 염문설이 나돈 숱한 사람 중에는 유교 불교의 대가가 있었다. 10여 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生佛이라 불렸던 천마산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킨 일이나 이학의 거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난공불락의 거대한 성과 같은 화담과 결국 사제 관계를 맺었던 일, ‘청산리 벽계수야’라는 시조로 벽계수를 매료시킨 일이 그러하다.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의 명기로 생몰년대나 그 가계가 미상이기 때문에 많은 전설을 남겨놓은 여인이다. 그녀는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혹은 장님의 딸이라고도 한다.

황진이가 15살의 나이로 妓籍에 몸을 투신한 사연은 그녀를 더욱더 매혹적이게 하며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출중한 예술적 재능은 뭇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녀가 풍류랑이라 자처하는 사내들을 보기좋게 걷어차 버린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평생을 두고 황진이를 짝사랑하던 어느 선비가 있었는데 운좋게 황진이와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 선비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 ‘平生一片心 慾渡銀河水’라 하였더니 황진이가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銀河天上水 世人豈能渡’라 하였다는 것이다. 곧 선비의 말인 즉 ‘평생 일편단심으로 그대를 사모하여 이제 견우가 되어 은하수에 놓인 오작교를 건너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이를 들은 황진이는 ‘은하수는 본시 천상에 있는 물이니 세상에 있는 당신 같은 보통 사람이 어찌 은하수를 건널 수 있으리오’라고 답하였다한다. 보기좋게 딱지를 놓은 것이다.

 

그녀는 한갓 기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시문학에 있어서 여류작가의 위상을 높여주는데 크게 공헌한 대시인이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녀의 작품은 시조 6수, 한시 4수가 고작이지만 이 짧은 시편들 속에서도 그녀의 시적 재능은 광채를 발하고 있다. 황진이는 정열의 여인이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라는 이 시조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낸다는 시상 자체도 신선할 뿐 아니라, 시어를 휘감아치는 솜씨 또한 대단하다. 한편 ‘허리’나 ‘춘풍이불’이 주는 감각적인 시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의 범주를 뛰어넘어 실존하는 사랑의 모습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신선함을 더하고 있다. 황진이는 다정다감하며 절절하고 애끓는 情人이었지만 자연을 알고, 인생의 허무와 유한함을 아는 시인이기도 하였다. ‘산은 녯산이로되 물은 녯물 아니로다/ 주야로 흘은이 녯물리 잇실쏜야/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라는 시에는 주야로 흐르는 물을 인생에 비유하고 가버린 인재를 아쉬워하는 인생의 깊이를 아는 원숙함이 숨어 있다.

이제 그녀의 한시 두 편을 감상하여 보기로 하자.

 

누가 곤륜산의 옥을 잘라               誰斲崑山玉

다듬어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가?   裁成織女梳

견우와 이별한 뒤에                      牽牛離別後

부질없이 창공에 던져두었네         謾擲碧空虛

 

시제는 「詠半月」이다. 반달의 모양이 여인네들이 늘 지니고 있던 빗의 모양과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지은 시이다. 누군가 곤륜산에 많다는 옥을 다듬어 빗을 만들어서 푸른 하늘 가운데 던져버렸다고 한다. 사랑하는 님과 헤어진 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빗을 하늘의 반달로 환치한 것이다. 여기서 빗은 곧 반달이요, 반달은 곧 님과 헤어진 여인의 심정이다. 결구의 ‘謾擲碧空虛’는 사랑하는 님과 헤어져 낙담하는 시인의 모습인 셈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심정 묘사를 하여 시적 성공을 거두었다. 일찍이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이 시를 두고 ‘일반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대결할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고 한 바 있다.

위의 시와는 기상부터가 사뭇 다른 다음의 시 「박연폭포」를 감상하여 보자.

 

늘의 물 줄기를 골짝에 뿜어내니                         一派長天噴壑礱

백 길이나 되는 용추폭포 물소리 우렁차다.             龍湫百仞水潨潨

흩날리는 물살 거꾸로 쏟아지는 것이 은하수인 듯   飛泉倒瀉疑銀漢

성난 폭포 가로 비껴 흰 무지개 완연하다.               怒瀑橫垂宛白虹

물벼락 어지러이 달려 골짝에 흥건하고                  雹亂霆馳彌洞府

구슬을 찧고 옥을 부순 듯 창공에 맑아라                珠舂玉碎澈晴空

놀이꾼들이여, 여산이 낫다는 말 마소                    遊人莫道廬山勝

모름지기 천마산이 해동 최고임을 알겠네               須識天磨冠海東

 

황진이는 자신을 일컬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이라 할 정도로 자부심이대단하였다. 누가 이 시를 가녀린 여인이 지은 것이라 하겠는가? 기구에서 전구까지는 박연폭포의 장대한 물줄기를 묘사한 것이고 마지막 결구가 이 시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중국의 여산이 제 아무리 승경이라 하더라도 천마산의 승경이 해동 최고라고 한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송도삼절이라 한 폭포와 함께 그녀 자신을 최고라고 자부한 것이기도 하다. 웅혼한 기상과 스케일은 여느 장부의 솜씨를 무색케 할 정도이다.

 

황진이의 말년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종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전한다. 『어우야담』에 진이가 병들어 죽으려 하자 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살아 있을 때 아름다운 것만을 좋아하였으나 죽어서는 절대로 무덤을 만들지 말고 큰길가에 묻어주오’라고 했다 하며 또 『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에는 ‘생전의 업보를 쌓았으니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묻어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로 삼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다. 그녀의 사후 몇 백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황진이의 이름은 우리 곁에 남아 있으나 좀더 많은 시편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우이시 제1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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