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한담(漢詩閑談)

사가정 서거정 / 조영님

운수재 2007. 11. 17. 05:25

 

 

四佳亭 徐居正 조 영 님

 

 

서거정은 성종 조에 주로 활동하였던 문인이다. 그의 호는 四佳亭․亭亭亭이며 자는 剛中이며 양촌 권근의 외손이다. 여섯 임금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면서 26년 동안 대제학의 직책을 맡아 무려 23회의 전형을 주관한 바 있다. 또한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의 서적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인으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여 본격적인 비평문학의 출발점이 된 『동인시화』를 편찬하였으니 이것은 후대 시화비평의 전범이 되었다.

 

그는 신흠과 허균에 의해 조선초기의 제 일인자로 인정받았으며, 이른바 관각문인의 대가로 손꼽혔다. 관각은 관청의 건물 즉, 정치하는 장소란 뜻이다. 대궐 주위에서 임금의 명에 따라 지은 시, 곧 應製詩라고 하는데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어용문학인 셈이다. 대체로 관각문학은 문학의 내면적인 것보다는 장식적인 기능을 중요시하여 격식에 맞게 잘 다듬는 표현에 주력하였다. 그래서 화려하고 넉넉하며 웅장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桂庭集序>에서 ‘관각의 시는 기상이 호방하고 풍부하며,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의 시는 정신과 기상이 맑고 담박하며, 중이나 도인의 시는 정신이 깔깔하고 기운이 모자란다’고 하여 관각의 시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시의 경지라고 주창하였다.

 

서거정은 여섯 살 때 시를 지어 신동이라 불리었다. 여덟 살 때 외조부 양촌을 모시고 앉아 묻기를 ‘옛날 사람들은 일곱 걸음을 걸을 때까지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것도 조금 느린 것 같습니다. 저는 다섯 걸음 안에 시를 지어 보겠습니다.’라고 하자 양촌이 하늘을 주제로 하여 ‘名’‘行’‘傾’ 세 글자를 운으로 불렀다. 이에 어린 서거정이 즉석에서 읊기를 ‘모양이 지극히 둥글고 커서 이름짓기 어렵고(形圓至大蕩難名)/땅을 안고 돌면서 절로 힘차게 다니는구나(包地回旋自健行)/지상을 덮은 중간에 만물을 포용하고 있는데(覆燾中間容萬物)/기나라 사람은 왜 무너질까 걱정했단 말인가?(如何杞國恐頹傾)’라고 하여 양촌으로 하여금 감탄과 칭찬을 그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소화시평』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이를 보아도 서거정은 시의 신동이라 할 만하며 더욱이 일찍부터 배짱과 기상이 대단하였던 듯하다. 그는 소년 시절에 이미 산사에서 삼 년 동안 책을 읽어 스스로 ‘早歲工夫萬卷書’를 자랑할 만큼 해박하였다. 이러한 재능과 해박함으로 그는 평생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시작활동을 꾸준히 하였는데, 자신의 말로는 만 수가 넘었다고 한다. 현재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시만도 5,000여 수에 이르니 다작의 시인이 아닐 수 없다. 해마다 바뀌는 계절과 절기를 맞을 때마다 매번 시를 지었기에 ‘立春’,‘春日’,‘七夕’등과 같은 시제는 그의 시집에 너무도 많아 시제만으로는 찾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라고 한다. 이렇듯 방대한 작품으로 인해 그의 시세계의 全鼎을 맛보기란 여간 쉽지 않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다작은 어떤 면에서 좋은 시를 양산하지 못한 결과가 되어 관각문학의 대가로 인정은 받았으나 내밀한 정감의 깊이가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평자들에게 외면당해 온 것도 사실이다. 다음의 시를 보자.

 

시 한 수 읊고 나면 또 한 수 읊고           一詩吟了又吟詩

종일토록 시 읊는 일밖엔 아는 게 없네   盡日吟詩外不知

지금까지 지은 시 만 수나 되는데           閱得舊詩今萬首

죽는 날에 가서야 읊지 못하겠지            儘知死日不吟詩

 

그는 내면의 울림이 있을 때에만 시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서너 편, 심지어 병중에 한가하게 있을 때에도 무려 10여 수까지 지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습관처럼 시를 지은 것이다. 이렇게 습관처럼 짓다보니 살아서는 그만둘 수 없고 죽게 되어야 시를 읊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나 시를 썼다. 연회에서의 소재거리는 늘 시가 되었으며, 평소 술을 좋아한 서거정이 과음으로 인해 酬唱을 하지 못하면 반드시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시를 써서 동석했던 이들에게 보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평생에 제작한 시를 물려줄 자손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작품이 결국 장독 덮개가 될 줄 알면서도 미련하게 시작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탄하는 내용의 시도 있다.

 

서거정의 시관은 그의 시화집인 『동인시화』에 잘 나타나 있다. 『동인시화』는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인과 그의 시 가운데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을 빠짐없이 거론한 시화집이다. 이 책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기상을 중요시하였다. 시에 있어서 수식보다도 먼저 기상이 우선함은 당연한 일이라 하였다. 제왕에게는 제왕의 기상이, 서민에게는 서민의 기상이 있듯이 시인의 기상을 잘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시라고 하였다. 그의 시관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것은 용사이다. 독창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격조 높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고인의 말을 따르고 배우는 용사의 효용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는『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라는 설화집도 지은 바 있다. 이것은 탐관과 승려의 대화, 호주가끼리의 음주시합 등의 이야기를 실은 것으로 일종의 해학적 이야기책이다.

다음의 시는 「春日」로 여러 시선집에 서거정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작품이다.

 

금빛이 수양버들에 들어가고 옥빛이 매화를 떠나는데   金入垂楊玉謝梅

작은 못에 새로 고인 물은 이끼보다도 푸르구나            小池新水碧於苔

봄 시름과 봄 흥취는 어느 것이 깊고 옅은가                  春愁春興誰深淺

제비도 오지 않고 꽃도 아직 피지 않았구나                   燕子不來花未開

 

봄이 오는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 연의 금빛과 옥빛의 선명한 색채대비를 통해, 그리고 두 번째 연의 이끼보다도 더 푸른 못 물은 봄의 생동감을 드러내는데 적절하다. 겨울에 피었던 매화가 사라질 때쯤 수양버들에는 어린 싹이 돋아나고 조금씩 황금빛을 띠기 시작한다. 그리고 작은 못 물은 점점 푸르게 된다. 이것으로 봄이 왔음을 알린다. 그러나 봄이 왔다고 무척 가슴 설레거나 기쁜 일만은 아닌 듯하다. 봄이 오면 그것대로 흥취가 있거니와 또한 봄이 가져다주는 이런저런 사연의 시름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봄에서 느낄 수 있는 양면적인 느낌을 어느 것이 깊고 옅은지를 자문한다. 이것은 정말 덧없는 질문이 아닌가? 그렇지만 아직 제비도 오지 않고 꽃도 피지 않은 완연한 봄이 아님을 결구에서 말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 허균은 이 시의 전편에 흐르는 기상을 ‘호방’하다고 하였다. 봄을 바라보는 여유로움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삶의 양면적인 느낌들이 적절하게 녹아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우이시 제1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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