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나의 짐이다
윤 준 경(시인)
시는 나에게 짐이다.
어쩌다 발 헛디뎌 빠져버린 함정이다.
나는 틈만 나면 이 함정에서 도주하여 뭔가 새로운 것, 쉽고 편한 것을 찾아 어슬렁거린다.
내가 자주 시를 떠나는 것은 시가 나를 절망시키기 때문이다. 뭔가 잡힐 듯하여 따라가 보면 시는 어느새 나를 비웃듯 저만치 가 있다. 절망할 일이 많은 세상에서 왜 시를 붙들고 절망해야 하나. 아무런 영화도 대가도 없는 이 머리 아픈 싸움을 왜 계속한단 말인가. 시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시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독일의 시인 릴케는 “네가 죽지 않고는 못 배길 시에 대한 열정이 있을 때 비로소 좋은 시인이 된다" 고 했다. 그런데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앞에서도 시 앞에 겸손히 무릎 꿇지 못하고 틈만 나면 시를 떠나 방황하니 어찌 나를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끝내 시를 좋아할 뿐 진정한 시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루는 버리고 하루는 집어드는 시, 하루는 나를 절망시키고 하루는 소망을 주는 시.
그럼에도 나는 시를 읽는다. 한 끼니 식사도 거르지 못하듯 하루도 시를 거르지 못한다.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으로 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 마경덕의「신발론」
모든 예술이 미와 감동을 추구하듯 내가 좋아하는 시도 아름다움과 감동을 지닌 시이다.
시의 감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四端 七情( 仁義禮知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이 모티브가 될 것이다. 어떤 시가 인간의 이러한 감정을 내포하지 않았을까마는 똑같이 보고 똑같이 겪어도 그 표현의 묘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따라 시가 되기도 하고 다만 객설이 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시의 진실을 좋아한다. 표현이 좀 서툴더라도 진실은 감동을 준다.
세상에 나와 이로운 못 하나 박은 것 없다. 못 하나만 잘 박아도 집이 반듯하게 일어나고 하다못해 외투를 걸어두는 단정한 자리가 되는 것을, 나는 간통을 하다가 생을 다 보냈다. 시를 훔치려고 소설을 훔치려고 외람된 기호를 가장했다. 아, 나는 남의 것을, 모든 남의 몫뿐이었던 세상을 살다 간다. 가난한 눈물로 물그림을 그리던 책상은 긍지처럼 오래 썩어가게 해달라. 단 하나, 내 것이었던 두통이여, 이리로 와서 심장이 터지는 소리를 막아 다오. 그리고 떳떳한 사랑을 하던 부럽던 사람들 곁을 떠나는 출발을 지켜봐 다오
― 이상희의「봉함엽서」
나는 또한 쉬운 시를 좋아한다. 시인 김수영은 시를 쓰는 데 필요한 언어는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쉬운 시가 유치한 시는 아니며, 진실한 시가 다 신변잡기일 수는 없다.
아내가 시장에 간 사이 애인과 연애를 한다
누가 볼까 쉬쉬 숨겨두었던 애인과 연애를 한다
백주에 낯뜨거운 연애를 한다
내 양 머리채를 잡고 교태를 부리는 애인은
물오른 가물치 같다 잔소리도 없다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마음, 천 개의 날개를 가진 애인과 연애를 한다
그러나 교태를 다 받아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아내의 장바구니는 너무 작고 가볍다
아내의 발은 너무 빠르다
천 개의 날개를 다 펴보기도 전에 나는 문밖부터 살핀다
애인에게 모자를 씌워 서둘러 서랍 속으로 돌려보내고
아내와 낯간지러운 연애를 한다
지구의 중심이 기우뚱 무너진다 하늘이 노랗다
― 고영의「쓸쓸한 연애 - 시작법」
나는 해체시나 난해시도 싫어하지 않는다. 시에 대한 나의 호 불호는 해체시, 난해시냐 아니냐의 문제라기보다 표현의 방법에서 오는 느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요즘 시가 단순한 서정보다는 구체적 사실과 이중삼중의 의미망을 구축해가는 경향 역시 미술이나 음악 예술에서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는 문화 예술의 아노미 현상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가 추구하는 새로움이며 낯설음이 아니겠는가.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 김춘수의「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나에게 있어 시는 해석이 아니라 느낌이다. 해석이 미치지 못할 때 나는 시를 느낌으로 읽는다. 얼마나 정교하고 상상력 또한 무한해지는가.
나는 이승훈의 시도 좋아한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읽고 있으면 그 운율에 마음이 실리고 알 수 없는 신비에 젖어들곤 하여 다음, 그 다음을 읽지 않을 수 없다.
지은 죄 안고 가라 무거울 때 슬플 때 밤비 온다 밤
비가 그대로 한 편의 시 가도 가도 부끄러운 길 밤비
맞으며 가라 흐린 날엔 새가 울고 그러므로 밤비 온다
시름은 많다 지은 죄 안고 가라 무거워도 견디고 가벼
워도 견뎌라
― 이승훈의「밤비」
현대인은 이미 정설만으로는 자신을 표현하기가 벅차다. 공상과학영화가 로봇이나 창조된 동물로 적을 쳐부수고 파괴하듯이 시도 틀을 파괴하고 미친 듯 소리치고 싶은 것이다. 터무니없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공상과학영화나 소설이 세계의 영화시장을 석권한 지 오랜데 비해 어쩌면 시에서의 이런 공상은 한발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는 새로워야 한다. 도도히 흐르는 변화의 기류를 따르지 못한다면 낡은 시 뒤떨어진 시가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한물간 시를 쓰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우이시 제2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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