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시의 꿈 / 신현락

운수재 2007. 11. 17. 04:52

 

시의 꿈

신 현 락(시인)

 

세상을 살면서 익숙해지지 않는 일들이 있는데, 나에게 시에 대한 담론은 참으로 익숙하여지지 않는 과제이다. 나는 시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이 별로 즐겁지 않다. 논리적인 언어는 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시를 쓰는 입장에서 보면 논리적인 언어는 논쟁의 언어요, 소음의 언어이지만 시의 언어는 평화의 언어요, 침묵의 언어이다.

 

시의 언어가 평화를 가져오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시의 본질적인 성향과 관련이 있을 성싶다. 대개의 서정시는 사물과 나 사이에 대립보다는 조화를, 분열보다는 통일을 지향한다. 흔히 동일성의 이론으로 설명되는 이 특성을 생각해보면 시의 언어가 왜 평화로움을 우리에게 주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개의 시론서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여기서 내가 따로 말할 필요는 없을 터이지만, 이 동일성과 관련하여 시에 대한 한가지 내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시가 동일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재의 우리가 동일성을 상실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동일성의 상실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숙명적으로 짊어진 형벌이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가장 완전하고 행복한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다. 양수 속에서 태아는 어머니인 우주와 완전한 합일을 이루고 있는데, 태어나면서 모태와 분리되게 된다. 탄생이라는 것은 완전한 우주, 동일성의 상태에서 분리되어 불완전한 현실에서 살아가게 되는 첫출발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늘 그러한 동일성의 상태를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그해엔 눈이 많이 나리었다. 나이 어린

소년은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 어디메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눈이 많이 나려 쌓이었다.

바람이 불면 심심하여지면 먼 고장만을

생각하게 되었던 눈더미 눈더미 앞으로

한 사람이 그림처럼 앞질러 갔다.

                   ― 김종삼 「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전문

 

동일성의 상태를 그나마 간직하고 있을 때가 유년기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를 자기와 동일시하고. 타인을 아직 느끼지 못하는 유년기는 우리가 태어난 후 기억하고 있는 가장 행복한 기억의 원형이기도 하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그러한 유년기의 기억을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유년시절은 마술과 환상으로 그득한 세계이다. 그 세계는 단순한 언어의 지시적인 의미로는 파악되지 않는 내밀한 몽상으로 가득 차있다. 언어의 내포적 의미로 가득찬 신비로운 마술의 언어를 위의 시는 잘 보여준다. 눈에 쌓인 초가집의 공간은 ‘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환상의 공간으로 바뀐다. 스와니강이나 요단강은 어머니의 양수 속에 있을 때의 그것, 완전한 우주를 상징한다. 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이 그림처럼 앞질러 갔다는 진술에 의해 더욱 낯설게 된다. 그림처럼 앞질러간 그 사람에 의해 환상과 현실은 거리를 획득하게 되고, 그러한 거리가 이 시를 단순한 동시 수준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을 막아준다.

 

이 시를 다소 길게 살펴본 까닭은 현대시에서의 동일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해보고자 함이다. 우리가 흔히 ‘동일성의 지향’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은 ‘청산도 절로절로 나도 절로절로’라는 식의 자연과의 합일, ‘나는 너다’라는 나와 너와의 분별없는 세계 등을 떠올리지만 그러한 시로는 산업화 후기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별 감동을 주지 못할 뿐이다. 위의 작품에서 시인은 동일성의 상실을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다. 세계에 대한 인식이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분열적인 세계에서 동일성의 상태를 지향하는 시인의 꿈을 보여주는 것이다.

 

꿈은 현실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죽은 자는 부활을 꿈꾸고 이별한 자는 만남을 꿈꾼다. 소월의 「초혼」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죽은 자를, 만해의 「님의 침묵」은 현실에 부재하고 침묵하는 님을 그리는 마음에서 나왔다. 모두 자기에게 부족한 것들을 채우고자 하는 원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꿈은 자기에게 있어야 하지만 있지 아니한 것들에 의해 촉발되는 것처럼 시는 분열되고 대립하고 있는 이 세계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다. 시의 뿌리는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이 조화롭지 않은, 부조리한 현실에 있지만 시의 줄기는 행복한 기억의 원형적 공간을 지향한다.

 

시는 그 현실의 부정성을 격문처럼 항거하지 않는다. 그래서는 시라고 할 수 없다. 격문은 현실 그 자체다. 그것은 메시지만 전할 뿐이다. 거기에는 꿈의 향기가 없이 피의 향기만 있을 뿐이다. 시의 언어는 현실의 부정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보여주는 동시에 거기에 꿈의 향기를 싣는다. 시로써 현실을 변화시킨다는 생각을 탓할 수는 없지만 이미 그것은 시와 거리가 멀다. 시의 언어는 말해야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침묵의 공간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시의 언어는 평화의 언어라고 하였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 평화는 꿈과 현실, 통일과 대립, 말과 침묵 사이에 존재하는 평화이다. 그 평화로움은 종교에서 말하는 평화와는 다르다. 종교는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그러나 시는 그렇지 않다. 어느 한쪽에 봉사하는 시에게 나는 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기에 축시나 송시 같은 시를 나는 시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초현실주의니 리얼리즘이니 라는 표를 달고 나온 시를 나는 의심의 눈길로 쳐다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시는 불순하다. 시는 어느 한 세계에 봉사하지 않는다. 시가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가 동일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세계 그 자체가 된다는 것이지 그 외의 무엇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제도에도 물들지 않는다.

 

시는 본질적으로 평화이고 불화이다. 두 세계 사이에 팽팽하게 긴장된 위험스런 평화이며 부정적인 세계 속에 살면서 그것을 초월할 꿈을 꾸는 행복한 불화. 그것이 시의 꿈이다. 우이시

                                                                                                                  (우이시 제2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