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조 영 님
조선후기로 들어오면서 실학사상의 대두로 사상과 문학 전반에 주목할 만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게 된다. 이러한 때 참신한 문학을 주창하는데 선두에 섰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박지원이다. 자는 중미이며 연암은 그의 호이다. 반남 박씨의 명문가의 후예였으나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과 저술에만 힘을 쏟았다. 뒤늦게 음사로 나아가 벼슬은 안의현감, 면천군수, 양양부사를 지낸 바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44세에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를 방문하고 그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열하일기』와 당대 사회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한 「양반전」「허생전」등의 단편과 한시 42수가 전하고 있다. 연암은 일찍이 홍대용과 더불어 청의 선진 문명을 경험하여 북학론을 적극 주창하였으며, 박제가․이덕무․이서구․유득공 등과 교류하면서 백탑시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연암 문학의 핵은 ‘創新’이다. 옛 것을 답습하지 말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여 창작해 내자는 것이다. 연암은 ‘천지는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된다’는 진보적인 관점을 갖고 새로운 문체를 이룩했다. 그는 글 도처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정통에서 벗어난 이른바 ‘연암체’의 문장은 패관잡서에 머무른다고 폄하되기도 하고 문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정조가 문체반정을 일으켜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연암의 손자로 영의정까지 지냈던 박규수가 평양감사로 있을 때 『연암집』을 간행하자는 동생의 말에 괜시리 문제 일으킬 것 없다고 하면서 묵살해 버릴 정도였으니 연암의 글이 당시 얼마나 충격적이고 문제성을 지녔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다음의 짧은 글 한 도막은 그가 진부한 표현을 얼마나 신랄하게 비난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다음과 같이 삼가 아뢴다’는 이른바 ‘右謹陳’이란 말은 진실로 속되고 더럽다. 유독 모르겠거니와 세상에 글짓는 자를 어찌 손꼽아 헤일 수 있으리오만, 판에 찍은 듯이 모두 이 말을 먹지도 못할 음식을 주욱 늘어놓듯이 쓰니 공용 격식의 글머리나 말머리에 으레 쓰는 투식의 말 되기에야 어찌 해가 되겠는가? 『堯傳』의 ‘옛날을 상고하건대’란 뜻의 ‘王若稽古’나 불경의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란 뜻의 ‘如是我聞’은 바로 지금의 ‘右謹陳’일 뿐이다.
연암은 위의 글에서 편지에 으레 썼던 ‘右謹陳’이란 표현은 마치 먹지도 못할 음식을 주욱 늘어놓는 격이니 도무지 이러한 표현을 판에 찍어내듯 왜들 쓰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남들 다 쓰는 ‘우근진’의 어투를 가지고는 살아있는 글쓰기가 어려우니 과감하게 던져버리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연암이 추구하였던 ‘창신’의 한 틀이다. 연암은 핍진한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하다면 세간의 속된 말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방언을 문자로 옮기고, 민요를 운률에 맞추기만 하면 자연이 문장이 이루어지고, 진기가 발현되나니, 답습을 일삼지 않고 남의 것을 빌어오지 않고, 현재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온갖 것을 표현해 낼 수 있다’고 하였다. 독창적인 글쓰기를 주장하였던 연암의 다음과 같은 글도 참고할 만하다. “글짓는 사람은 더러워도 이름을 감추지 아니하고, 비루해도 자취를 숨기지 않는다. 맹자가 ‘성씨는 함께 하는 바이지만 이름은 혼자만의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나는 다만 ‘글자는 함께 하는 바이지만, 글은 혼자만의 것’이라고 말해본다.” 이름을 가진 사람이 저마다 고유하고 개체화될 수 있는 것은 김, 이, 박 등의 성씨가 아니라 성씨 뒤에 붙은 이름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글 짓는 자들이 다같이 글자를 매개로 하여 쓰지만 차별화 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나름의 호흡으로 다듬어낸 독창적인 글쓰기일 뿐이라고 한다. 시대와 역사를 통해 고전이라고 하는 전적이 매 시간 아니 매 초마다 등뒤로 수없이 쌓여 가고 있다. 이런 전적들을 헤집어 베껴내는 것이 진정한 글쓰기가 아니요, 촌스럽고 비루하지만 자신의 글을 써야한다는 요지일 터.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출판물의 가치여부를 자문하는 일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작금의 현실에서 어찌 보면 비뚤비뚤 쓴 초등학생의 일기야말로 더 가치 있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다.
연암은 대체로 시보다는 산문에 뛰어났다는 평을 받았다. 산문에서처럼 충격적이고 획기적이지는 못하나 역시 재기가 돋보이는 작품이 있어 주목된다. 다음의 두 편의 시를 감상하기로 하자.
우리 형님 모습이 누구와 닮았던가? 我兄顔髮曾誰似
아버님 그릴 때마다 형님 얼굴 뵙곤 했지 每憶先君看我兄
이제 형님 생각나면 어느 곳에서 뵈올까? 今日思兄何處見
의관을 갖추고서 시냇물에 비춰보려네 自將巾袂暎溪行
시제는 「燕巖憶先兄」이다. 형님을 생각하며 지은 시이다. 아버님의 모습을 꼭 빼 닮은 형님! 형님을 뵈올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님을 뵙는 듯하였는데 이제 형님마저 돌아가시고 아니 계시니 그 모습을 어느 곳에서 볼 수 있단 말인가. 단정히 차려입고 시냇물에 내 모습을 비춰보려하네. 아마도 시냇물 속에 비친 나의 모습 속에 형님의 모습이, 또 아버님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서겠지. 가슴속의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곱고도 잔잔하게 여울져 괜시리 눈물이 날 듯 콧날이 시큰거린다.
다음의 시제는 「道中乍晴」이다.
백로 한 마리 버들 뿌리 밟고 서 있고 一鷺踏柳根
백로 한 마리 물 속에 서 있네 一鷺立水中
산허리 짙푸르고 하늘은 흑빛 山腹深靑天黑色
헤일 수 없는 백로가 하늘로 비상한다 無數白鷺飛飜空
아이가 소를 타고 개울 물 첨벙대자 頑童騎牛亂溪水
개울 저편으로 날아오르는 무지개 隔溪飛上美人虹
길가는 도중에 비가 잠깐 내렸다가 다시 맑게 개인 상황을 포착하여 쓴 시이다. 백로 한 마리는 물가 버드나무에 앉아 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물 속에 서 있다. 비가 온 탓으로 산허리는 짙게 푸르고 하늘은 컴컴하다. 물가에 백로가 두 마리인가 싶더니 갑자기 수도 없이 많은 백로가 하늘로 치솟아오른다. 물가의 고요를 깨는 어린 방해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철없는 어린아이가 소를 타고 개울물을 첨벙대며 건너가자 물가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쉬고 있던 백로떼가 놀라 일제히 날아오른 것이다. 이때 어두컴컴한 하늘에 찬연한 무지개가 섰다. 놀란 백로떼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 햇살이 하얀 속살을 드러낸 것이다. 시제 「道中乍晴」은 비가 내렸다가 금새 개인 상황을 두고 말함이기도 하면서 검은 하늘에 날아오른 하얀 백로떼를 두고 개었다고 표현하였을 수도 있다. 요란스레 첨벙대며 개울물을 건너가는 어린아이와 그 때문에 놀라 피어오른 듯한 무지개! 시상의 발상이 재기발랄하다. 산문류에서 보여준 반골적 성향을 가진 연암의 속내가 이런 시편에서는 참으로 섬세하고도 여리게 드러나 있다. 모름지기 강건함과 섬세함을 두루 갖추었으니 대가가 아닐 수 없다.
(우이시 1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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