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조 영 님
李安訥(1571~163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東岳이며, 자는 子敏이다. 그는 해동강서시파로 유명한 李荇의 증손이자 朴誾의 외증손이며 李植의 종숙이 된다. 벼슬은 이조정랑이 되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바 있으며 판서에 올라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는 정철의 제자로 동년배인 권필, 선배인 윤근수, 이호민 등과 동악시단이란 모임을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차운로는 동악의 시를 평하기를 ‘동악의 시는 마치 형악에 구름이 걷힌 것 같고, 동정호에 물결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여 시격에 있어서 웅장하고 뛰어난 것이 광야와 같으나 기교와 조화는 다소 부족하다고 한 바 있다.
양경우는 『제호시화』에서 ‘이안눌의 시격은 渾厚하고 穠麗하여 세상에 드문 재주이다’라 하고 다음과 같은 시화를 남겼다. 동악이 전라도 담양부사로 나갔을 때에 면앙정에 함께 올라 시를 지었는데 먼저 양경우가 ‘지는 해 넘어가려 하자, 평평한 들판은 더욱 넓고(殘照欲沈平楚濶)/ 높은 하늘 끝이 없어 뭇 봉우리가 높다(太虛無閡衆峯高)’라고 짓고 스스로 이만하면 뛰어난 시라고 여겼다. 곧 동악이 따라 짓기를 ‘서쪽으로 터진 내와 들은 어느 곳에서 끝날 건가?(西望川原何處盡)/ 남으로 와서 경치 좋기는 이 정자가 제일이라(南來形勝此亭高)’라고 하였다. 이에 그 솜씨에 놀라 ‘목과를 던졌는데 瓊琚로 갚는다 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로구나’라고 하였다 한다. 즉 나는 모과같이 못생긴 시를 지었는데 동악은 구슬같이 귀중한 시로 답하였다는 뜻이다.
동악은 權韠과 함께 二才로 칭송 받았다. 남용익은 『호곡만필』에서 ‘우리나라에 권필과 이안눌이 있는 것은 마치 당의 이백과 두보와 같고 명의 이반룡이나 왕사정과도 같다’고 하였다.
이안눌은 권필과 절친한 사이로 젊었을 때에 시를 지어서 권필에게 평을 받지 않고는 감히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다 한다. 동악은 권필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 수많은 신농씨의 약도 소용이 없고(浩蕩神農藥)/ 대우모 같은 문장도 이젠 끝이 났구나.(蕭條大禹謨)’라 하였다. 대우모는 서경의 편명이다. 또 동대문 밖 권필이 죽은 곳을 지나가다가 다음과 같은 시 한 연을 지었다.
동대문 밖 꽃 떨어진 곳을 지나가려니 行過郭東花落處
가신 이 맺힌 시 이제토록 저려오네 故人詩骨至今悲
詩骨은 시가 골수에 배었다는 뜻이다. 권필은 ‘宮柳’ 시로 인해 유배를 가려다 끝내 동대문 밖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그곳을 지나자니 죽은 벗의 골수에 사무친 시가 생각나 지금까지도 슬프다는 것이다. 호곡의 말처럼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씩 떨어졌다 하겠다.
권필과 이안눌은 전대의 고답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현실감 있는 절실한 시를 썼던 것이 세인의 주목을 받았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석주의 시는 매우 곱고 시원하며 동악의 시는 매우 깊고 강건하다. 이를 선가에 비유하면 석주는 頓悟요, 동악은 漸修에 해당되니 두 사람의 문로가 같지 않아 그 우열을 논할 수 없다’고 한 동명 정두경의 말을 인용하여 싣고 있다.
이제 동악의 대표작인 「四月 十五日」을 감상하여 보자. 이 시는 동악이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겪은 일을 술회한 것이다.
사월이라 보름날 四月十五日
이른 아침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 平明家家哭
천지는 변하여 쓸쓸해지고 天地變蕭瑟
싸늘한 바람은 숲을 흔든다 凄風振林木
깜짝 놀라 늙은 아전에게 물어보았네 驚怪問老吏
곡소리 어찌 이리 구슬픈가 哭聲何慘怛
임진년에 바다 도적 몰려와서는 壬辰海賊至
바로 오늘 성이 함락되었답니다 是日城陷沒
이때 다만 송 사또께서 惟時宋使君
성벽을 굳게 하여 충절 지켰죠 堅壁守忠節
백성들 성안으로 몰려 들어와 闔境驅入城
한꺼번에 피바다를 이루었지요 同時化爲血
쌓인 시체 밑에다 몸을 던져서 投身積屍底
천백 명에 한둘만이 살아남았죠 千百遺一二
그래서 해마다 이날만 되면 所以逢是日
상을 차려 죽은 이를 곡한답니다 設奠哭其死
아비가 제 자식을 곡을 하구요 父或哭其子
아들이 제 아비를 곡을 하지요 子或哭其父
할아비가 손주를 곡을 하구요 祖或哭其孫
손주가 할아비의 곡을 합니다 孫或哭其祖
어미가 제 딸을 곡하기도 하고 亦有母哭女
딸이 제 어미를 곡하기도 하지요 亦有女哭母
지어미가 지아비를 곡하는가하면 亦有婦哭夫
지아비가 지어미를 곡한답니다 亦有夫哭婦
형제나 자매를 따질 것 없이 兄弟與姉妹
살아 있는 이들은 모두 곡을 합지요 有生皆哭之
이맛살 찡그리며 듣다가 말고 蹇頞聽未終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네 涕泗忽交頤
아전이 나서며 아뢰는 말이 吏乃前致詞
곡할 이나 있다면 덜 슬픕지요 有哭猶未悲
칼날 아래 온 집안이 죄다 죽어서 幾多白刃下
곡할 이도 없는 집이 얼마인뎁쇼 擧族無哭者
동래부사로 부임한 동악은 4월 15일날 이른 아침부터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상하여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이 바로 바다 왜적의 침입으로 동래성이 함락되어 당시 부사였던 송상현이 충의롭게 순절하고 온 성안은 피바다가 되고 천백 명에 한두 사람만이 겨우 살아남은 대참상이 있었던 날이라고 한다.
이날만 되면 곡을 하는데, 아비는 아들을 위해, 아들은 아비를 위해, 할아비는 손자를, 손자는 할아비를 위해 곡을 한다는 반복적 표현은 비참함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결구에서 울어줄 가족이나 있으면 덜 슬프겠소만 온 가족이 몰살당하여 울어줄 이도 없는 넋이 얼마인지 모르겠다는 아전의 말은 더욱 슬픔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 시를 읽노라니 마치 그 당시의 참상이 눈에 선하다. 가슴을 치며 울분을 느끼게 할 만큼 사실적이다.
동악은 평생에 두보의 시를 3만 5천 번이나 읽을 정도로 두보에 심취해 있었는데 이 시 또한 전란의 참상을 노래한 두보의 시 「三吏三別」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두보는 안록산의 난리를 만나 농촉 지방을 떠돌며 시에다 이때에 직접 목도한 사실과 숨겨진 일화까지 모두 빠짐없이 서술하였다 한다. 당시에 이것을 일러 詩史라고 하였다. 즉 시로 쓴 역사란 뜻이다.
이 한편의 시는 임진왜란을 다룬 그 어떤 역사적 사료만큼이나 소중하다. 시를 통해 그 당시의 백성들의 애환 등 시대상을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시 역시 시대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한 위의 시는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우이시 제1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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