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한담(漢詩閑談)

백곡 김득신 / 조영님

운수재 2007. 11. 30. 06:47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 /   조 영 님

 

김득신은 조선 중기에 활동하였던 문인으로 자가 子公이요, 柏谷은 그의 호이다. 그는 역대 시인들 중 가장 노둔하였던 시인으로 알려져 왔다. 그는 10살이 되어서야 겨우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十九史略』의 첫 번째 장 26 글자를 석 달이 되어도 구두를 떼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외숙인 목서흠은 아예 공부를 그만두라고까지 했으나 아버지만은 백곡이 좌절하지 않게끔 장래에 크게 될 인물이라고 재차 인지시켜주면서 적극적으로 공부를 시켰다. 그래도 15세가 되도록 문리를 깨치지 못했다고 한다.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하였으나 여러 차례 낙방의 고배를 맛보다가 겨우 39세의 늦은 나이에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이때 문집에 한유와 사마천의 글을 천 번이나 읽고 겨우 진사과에 합격했다고 자조하는 시가 보인다. 이후 문과에 오르기 위해 책 상자를 지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몇 해를 공부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다가 59세의 나이에 문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후 성균관 전적, 승문관 판교, 병조좌랑 등을 지냈지만 벼슬살이가 생리에 맞지 않았던지 그만두고 시골에 은거하며 詩酒로 남은 생을 보냈다.

 

백곡은 아둔하였지만 그래도 시재는 어려서부터 뛰어났던 것 같다. 그의 시재를 일찌감치 알아차린 아버지가 시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에 김득신의 시가 당대 최고라는 평을 李植으로부터 듣기도 하였다. 김득신의 시는 선천적인 재능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갈고 닦아 이루어진 것으로 淸新한 唐詩의 시풍을 띤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 김득신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田家」를 감상하여 보자.

 

울타리 헤져 늙은이 개를 욕하고     籬弊翁嗔狗

아이 불러 일찍 문을 닫네               呼童早閉門

어젯밤 눈 속의 발자취 보니            昨夜雪中跡

분명히 범이 마을로 왔다 갔구나      分明虎過村

 

개가 장난을 쳐 울타리를 망가뜨리자 늙은 주인장은 개를 향해 욕을 하며 아이더러 일찍 문을 닫으라 한다. 이유인즉 눈 위에 범 발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범이 마을을 지나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임방은『수촌만록』에서 이 시가 백곡의 시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시일 것이라 칭찬하였다. 이 시의 장처는 곧 농촌의 정경을 그림같이 핍진하게 묘사한 데 있다. 또한 농촌 생활과 유리되어 있지 않은 시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어 더욱 그러하다.

다음의 시는「龍山」이다.

 

찬 구름 속의 고목              古木寒雲裏

흰 비 내리는 가을 산          秋山白雨邊

저문 강에 풍랑 일어           暮江風浪起

어부 급히 배를 돌리네        漁子急回船

 

당시에 이 시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전송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 鄭善興이 백곡의 이 시를 부채에 적어두고 소매에서 자주 꺼내보니 효종이 그 부채는 어탑에 두고 다른 부채를 내렸다고 한다. 또 효종은 화공에게 이 시를 주면서 병풍으로 만들어 바치라고 하고, 唐詩에 넣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이 시는 ‘詩中有畵’라 할 수 있겠다. 싸늘한 구름 속에 앙상한 고목, 뽀얗게 지나가는 비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가을 산, 이러한 배경을 뒤로하고 풍랑 이는 저문 강가에서 급히 배를 돌리는 어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백곡은 ‘대단치 않은 글귀는 有聲畵가 아닌데 외람되게도 상감께서 보시고 병풍에 그리게 하셨으니 세상에 다시없는 영광’이라고 하였다. 시를 읽으면 정말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풍랑 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 ‘백곡은 재품이 매우 노둔하였는데 많은 독서로써 밑바탕을 튼튼히 하여 노둔함을 벗어나 재주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 이 시를 소개하였다.

 

김득신은 시를 지음에 있어 苦吟을 중시하였다.『수촌만록』에는 ‘김득신이 평생에 시만을 연구하고 정신을 푹 쏟아서 글자 하나를 놓으려면 천 번씩 고치고 반드시 절묘하게 만들려 했으니 賈島와 같은 유’라 하였다. 그의 시에 ‘사람됨이 편벽해 매번 시를 탐닉하지만/시를 지어 읊조릴 때 글자 놓기가 미덥쟎네./ 결국 미더워야 통쾌해지니/ 일생의 辛苦를 뉘 알리요?’라 한 것으로 보아 조탁과 단련에 남다른 공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도 말했듯이 ‘대개 시가 천기에서 우러나 조화의 오묘한 방법을 응용한 것이 가장 상품이 되는 것’이지만 자타가 공인한 노둔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야 더욱 그러했으리라. 한편 백곡은 부지런히 博學에도 힘썼다. 고금을 통해 학문으로 성공한 선비는 부지런함으로써 이룩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은 본래 노둔하게 생겨서 다른 사람보다 배나 많이 읽었다고 한다.『사기』『한서』『한유 문집』『유자후 문집』 같은 것은 모두 손으로 베껴가며 만여 번을 읽었으며 그 가운데『백이전』을 가장 좋아하여 일억 일만 삼천 번을 읽고 드디어 서재 이름을 ‘億萬齋’라 하였다고 한다. 그가 글을 많이 읽은 것을 두고 “경술년에 가뭄이 들어 팔도에 흉년이 들고 전염병까지 겹쳐 굶어죽은 시체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때 어떤 이가 ‘금년에 죽은 사람이 그대가 읽은 책과 어느 것이 더 많은가?’라고 희롱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일필휘지의 이백이나 5살 때 이미 신동 소리를 들은 김시습이나 지게에 가득한 책을 며칠만에 몽땅 외워 버린 정약용 같은 천재형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노둔하였지만 부단한 학습과 단련을 통해 결국 김득신은 조선 중기에 시명을 드날리게 되었다. 어찌보면 타고난 시재를 탓하며 시 짓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백곡의 삶과 시는 적잖이 위로가 될 듯도 하다.

                                                                                                         (우이시 제165호)

'한시한담(漢詩閑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적벽부(赤壁賦)-소식  (0) 2012.09.03
우선 이상적 / 조영님  (0) 2007.11.29
추사 김정희 / 조영님  (0) 2007.11.28
연암 박지원 / 조영님  (0) 2007.11.26
여류시인 이옥봉 / 조영님  (0) 2007.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