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시를 범하지 말아야 할 범어 / 한태호

운수재 2007. 12. 6. 03:46

 

 

시를 범하지 말아야할 범어(凡語)

한 태 호(시인)

 

시는 논(論)이 아니라 행(行)이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써지는 것이다.

여름의 웃음소리를 들어 보셨는가요?

아련한 지평선 끝에 우거진 미루나무, 삼나무 숲 사이로 뚫린 신작로 틈 사이 위로 보이는 푸른 하늘에서 떨어지는 어둔 푸른 웃음을 보셨나요?

기름보다 더 푸른 광택으로 빛나며 선회하는 깊은 연못 위에 떠도는 날파리 소리를 잡아보셨는가요?

봄바람으로 내려앉는 하얀 코털 민들레꽃의 창살에 아금한 통증을 느껴보셨는가요?

 

시는 지각된 산물입니다. 내 몸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 손 소리, 코 느낌, 눈 초리, 귀 냄새 입니다. 방사(放射)된 몸으로 체험하지 않은 시는 시 쉬라고 소리치기에 시시합니다. 야뇨증에 걸리며 쉬쉬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아예 야맹증에 걸려 길을 잘못 들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그린랜드 섬에 갇힌 이글루 얼음집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죽어갑니다.

 

이때부터 시는 論이요 行이 되고, 논이 아닌 행이 되며, 행이 아닌 논이 되기도 합니다. 인식하는 것이 허무하고, 허무하기에 행동하나, 행동하면서 허무하기에 다시 새로움을 깨닫기 위해 인식합니다. 모든 것이 돌고 허무한데 어디에 시가 있겠습니까? 변하지 않는 것은 내 몸뚱이 하나뿐이기에, 그 중심에 마음의 피부가 트고, 적혈구가 약동하는 심장을 중심에 둡니다. 그리고 몸으로 느끼고 지각하는 것들만 내가 알고, 아는 것이라고 느낍니다. 겨우 파리한 오로라처럼 번지는 작은 틈새라도 느끼면서, 언어를 헤작이려고 발돋음 합니다. 가부좌 해보지 않은 어리석음과 졸린 발을 일으켜 기어 다니며 혈맥을 돌리려 했던 어리석음을 다시 느낍니다.

 

이제서야 느낍니다. 발저림은 가만히 기다려야함을. 보이지 않는 당신의 음성은 기다리지 않고 드러낼 수 없으며, 느껴지지 않는 당신의 체취를 엎드리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음을, 기도하는 나의 목덜미에 스치는 당신의 입김은 사랑의 입맞춤이 아닙니다. 얼음이 지나가는 한랭전선의 따가운 찢김이 바알갛게 속살을 헤집어 놓습니다. 눈 감은 여린 눈썹 위에 데롱이는 맑은 이슬이 당신의 눈물이 아님을 압니다. 언월도 높이 창끝에 효수된 언어 머리라도 꽃아 둡니다. 험악한 도척(盜跖)의 열기 없는 작살에 목을 내놓아야, 당신의 따뜻한 가슴이 틀어대는 자애로운 선풍기 바람에 푸욱 찌게 만들고, 그때에야 겨우 감을 잡습니다.

 

당신은 나의 곁에 어느 때고 어디서고 같이 서 있지 않음을 압니다. 당신이 같이 한다고 믿는 그 삶이 나의 환상임을 압니다. 당신은 부처님 후광 위에 숨은 탱화도 아닙니다. 당신은 예수의 마른 가슴에 고여 온 피 찐득이도 아닙니다. 그 밑에 천년의 신비로 숨겨둔 고고한 언어로 퍼올릴 듯 설레면서도 모두 사라진 우물이었습니다.

 

언어는 우리들의 행적에 녹아들지 않습니다. 시어는 우리들의 쇄골 속에 대롱거리지 않습니다. 시는 보이는 곳에 놓여지지 않고, 듣는 곳에 모셔지지 않고, 느끼는 우물에 쏟아지지도 않습니다. 시는 보이지 않기에 보이도록 거풀거리고, 들리지 않기에 까만 오석으로 뗑뗑 부딪혀 쇳소리 내고, 느끼지 않기에 버들강아지 귓불을 살다듬습니다. 시가 쉽게 보이고, 언어가 빨리 느끼고, 소리가 간쪽하니 맛보이면, 외로운 사막에 살던 어느 하이에나가 다 먹어치우지 않았을까요?

 

시는 행랑방에 걸려 있는 홍시처럼 하얗게 서리쳐갑니다. 하얀 눈 덮인 원두막 꽝 아래 묻어둔 밤고구마 액즙을 쏟아냅니다. 극렬한 고통의 환희로 방사되는 정자 꼬리로 겨우 하늘의 언어를 착생시킬 수 있습니다. 창대 세울 조w심마저 없으면서 어찌 황금마차 몰며 전쟁터에 출정하시렵니까?

 

시는 배우는 게 아닙니다. 더욱이 창작하는 개 아닙니다. 게가 개가 아니듯이 개가 게가 아닙니다. 그러니 시에게 시창작론 같은 게 없습니다. 게와 개처럼 같이 살며 느끼는 생활이 전부입니다. 다만 제대로 된 낱알을 고를 줄 아는 키잡이는 바람이 불 때 봉당에 나앉아 키질을 합니다. 소박맞은 여인네의 한 타령으로 싸르륵 싸르륵 언어의 키질을 합니다. 긁은 돌은 손으로 만져 덜어내고, 작은 돌은 무게로 느끼며 더듬고, 미세한 터럭돌은 키로 바람질하며 날려 버립니다. 시는 감으로 치는 것입니다.

 

키질하는 행위를 잊은 채 소소한 저녁 바람 이는 산간 초막에서 소복 입은 여인이 또 키질을 합니다. 연기처럼 스러지는 정감은 수리처럼 하늘로 띄우고, 장닭처럼 손톱을 쪼며, 물개처럼 매끄럽게 흐르고, 표범처럼 어깨를 달리고, 사슴처럼 먼 산을 바라보면서, 언어의 키질을 골라 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신의 키질은 쌀알 고르는 밥 짓기가 아님을 압니다. 그녀의 정한과 한숨과 고독과 웃음이 모두 민들레 씨앗으로 날아가며 구석진 토담 옆에 착생하는 신비를 깨닫습니다. 언어의 키질이 아니라, 덤프트럭보다 무거운 몸무게를 다느라고 신음해온 먼지 낀 체중계를 침대 밖으로 탈출시키는 것입니다. 무게재기로부터의 일탈입니다. 시의 키질은 바람놀이입니다. 대장간의 풀무처럼 씩씩거리며 붉은 용의 혓바닥을 녹여냅니다. 언제 뜨거운지, 언제 구울지 모른 채, 지금 이 순간의 몰입으로 사산아를 낳습니다. 씨받이 유모도 없이 나 홀로 외딴 방에서 탯줄을 자릅니다. 흥건하게 적신 고삼의 피를 빨며 따스한 슬픈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군불 때러 아궁이에 나앉습니다. 시의 군불 때기는 영원히 멈출 수 없습니다. 죽은 아기를 낳아 본 미혼모는 압니다. 서모의 설움이 어떠한지. 언어의 정경부인이 존재한다면, 단아한 그 말에 복종하는 하인은 오히려 편안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언어의 망나니에게 평안한 안내를 해주지 않습니다. 시어의 목을 아름답게 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죄수의 아픔도 칼을 든 자신의 고통도 이해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느 부잣집 마나님이 언어의 다락방 열쇠를 다 꿰차려 하겠어요? 언어의 무게가 싸전 밖으로 쏟아지기 전에 열쇠를 물려주려합니다. 양도하지 않는 고집은 무지함입니다. 돌쇠방을 내다보며 자애롭게 말하지 않은 종가댁 마나님은 표독하기조차 합니다.

 

언어의 광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다만 하인들이 두려워 그 문을 살며시 열어보려 하지 않을 뿐입니다. 언어의 소슬문을 살짝 열어보십시오. 그때서야 언어의 기법이 소곤거리고, 시론이 자근거리며, 새로운 창작론이 비비적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봉당 툇마루 섬돌에 놓인 고무신의 고요와 뜨락을 끄는 나막신의 떼르륵 소리를 보고 압니다. 시의 소리를 들으며 정경을 그리며, 시의 형상을 보며 다가오는 조각발의 율동을 느끼고, 시의 율조를 만지면서 비행선처럼 부푸는 시의 시야를 같이 봅니다. 시가 드나드는 마당에 스치는 한낮의 환영을 볼 수 있습니다.

 

시는 보이려 할 때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할 때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제대로 서 있지 않는데 타인의 푯대가 어찌 제대로 기준점으로 보일까요? 시 쓰기에는 창대꼬지가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마음 크기나 삶의 크기로 재어 보세요. 그리고 그 크기대로 쓰고 담는 겁니다. 언어를 담는 몸뚱이가 작은데, 그 소반에 어찌 새로운 언어를 더 얹을 수 있을까요. 떼구루 떼구루 자꾸 넘치는 언어성을 느낄 때면, 자신의 언어 소반을 새로 더 짜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촐한 소반으로 조반상 짓는 만족으로 행복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면, 위대한 각자(覺者)이십니다. 다만 작은 소반에 진수성찬을 담는 대감님이 되려는 데서 언어에 호령만 치는 가난한 최부자가 되지 않을까요.

 

언어를 놓으십시오. 그리고 행으로 몸을 닦으세요. 언어는 입에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뇌 속에 숨어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언어의 신비는 차가운 선녀탕에서 불알을 달달 떨며 호두알 깨듯 터추어 볼 때 천둥처럼 다가오는 괴물입니다. 언어의 호두를 망치로 힘껏 깨셔야 합니다. 참기름 칠해서 손안에서 헤작이며 갖고 노신다면 침묵해야 합니다. 아니면 섬돌 위에 놓고 뒷굽으로 짓밟아 으깨세요. 그리고 표표히 무릎 꿇고 묵상하며 자신의 언어 습관을 해탈하세요. 비룡소의 얼음물을 등줄기에 맞으며 아파하세요. 그리고 신음하며 푸른 새 언어를 토해내세요. 이때부터 금강폭포의 하얀 눈보라가 도처에 푸른 꽃무늬를 피울 겁니다. 얼음 깨는 데는 바늘이면 족합니다. 커다란 송곳이 없어도 얼음은 깨어집니다.

너무 선문답 같은가요? 그럼 도구적 시인의 언어를 부어보죠.

 

시에서 ‘시가 어떠해야 한다’는 가치진술과 ‘시가 어떠하다’는 사실 진술 중에서 어느 것을 중요시 하십니까? 두 명제 간에는 깊은 차이가 있습니다. 시론은 시가 어떠해야 하는 마땅한 가치 제시이며, 현 시인의 사실 행태를 단순히 전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시인의 창작론은 가치 영역에 속합니다. 가치 영역은 사실 영력에 의해 제한받지 않습니다. 가치론은 ‘있다’가 아니라, ‘있어야 한다’ 입니다. 사실 가치는 시의 가치 여부를 논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시에 가치를 투여하고, 발달시키고, 가치 부여받을 만한 당위성을 논의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다만 현실 상황 속에서 경험적으로 증명되고 논리적 과정을 거칠 뿐이기에, 대개의 사실 진술은 지적 판단, 당위성에 대한 약속어음만 발행할 뿐, 현금 거래를 하지 않더군요. 상찬(賞讚)된 것과 상찬될 가치 있는 것, 생각 없는 상찬과 사려 깊은 상찬 사이의 골을 알고 있기에, 저는 돼지의 귀로 비단 지갑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제 시혼으로, 시는 미적 관심을 끌고, 미적 가치를 제공하며, 미적 숭고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미란 “즐겁게 하는 것을 바로 지각하는 것”(아퀴나스)이라죠. 미적 관심은 실생활에서 시적 사물을 상징하고 표현하는 데서 발생하기에, 제 시어는 자연히 질적인 힘과 생생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나의 장면으로 대상을 감상하는 순간에 제 시상은 미적 승화성을 겨냥합니다. 제 미적 가치는 대개 주의 끌만한 특징, 특별한 대상, 잊지 못할 것, 일상 혼란에서 구제해야할 특수한 상황이나 내용 등의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직접 감지(지각)하면서 매혹적인 의미나 느낌을 주는 시적 성질을 표현합니다. 대개는 그 순간의 본질과 그 상대적인 성질이나 외양을 표현하려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상관물의 총체적 표현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때 주목하지 못하던 낯선 침묵이 가까이 다가오고, 이상한 시감을 끌어내게 됩니다. 그냥 대상이 다가오는 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무간격적인 수용이 실험적 새 가치를 추구하게 되고, 그 미적 가치가 미적 숭고성을 쬐끔이나마 가까이 끌어당기더군요.

 

대개의 우리 시는 기대나 예상되는 상투적 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가끔 우리가 무얼 보고 무슨 미적 가치를 찾으려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서리가 두려워 관습을 쫓고, 심오한 인생이 힘겨워서 새싹을 쭈그리고 있는 듯하더군요. 우리는 이미 파도 소리에 너무 익숙해진 해변의 어부입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지각이 시들해져서, 시들한 옛 인식만으로 살아가는가 봅니다. 전 아직도 일상적인 것을 미로 자극하고, 낯선 감성 쫓는 시성을 좋아합니다. 신선한 것은 새로운 지각의 영토를 확장시키고, 언어의 기적을 부활시키고, 가난한 글쟁이를 갱생시켜 줍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색채, 소리, 느낌, 인상, 추측, 상상력을 더욱 살리려 합니다. 순간적 느낌은 항상 다릅니다. 아직 일천하기에, 무엇이 더 진실한지 묻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종류인지 색상 파악하기에 바쁩니다. 언젠가 진실한 지각이 이루어지면, 집합적으로 특정 모순이나 부정을 담아낼 수 있으면 족할 겁니다. 아니면 시 감상의 세계로 만족할 수 있겠죠. 이러한 모순적 역설이 오히려 더 고양된 인식을 가능케 하고, 높은 예술성을 가져다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다만 지적 겸손함과 때묻지 않은 오만함이 감동적으로 공존하는 시를 쓰고 싶을 뿐입니다.

낙엽 같은 언어를 너무 많이 늘어놓았기에, 창작시론에 보시하는 마음으로 제 시 한 수를 읊어봅니다.

 

여름 웃음의 해부학

 

그녀 웃음이 가는 바늘귀를 스친다

작은 피 한 방울, 고요의 투명한 고리,

 

그녀 웃음은 솔 비누, 말벌 침, 고요히 떠는 나침반,

가끔 잃어버린 부표로 떠오르며 추억을 수정한다

극지로 향하는 시간의 바늘, 떨리는 마음의 유전(油田),

가끔 귓밥 뒤에 서린 하얀 새치 흔들며 지난다

 

그녀는 인후염 앓는 당신에게 웃으며 명령한다

“그대 후회하는 사랑의 방패에 검붉은 피 토하세요”

그녀의 마른 건초 웃음 속에 잃어버린 수정 바늘,

오늘도 추억 찌르는 긴 창(倉) 되어 창턱에 걸린다

 

그니 웃음은 오랜 세월의 주름 깨는 작은 쇄빙선,

고요의 땀띠마다 스며들며 여름 과녁에 꽂힌다

그니는 다가올 가을 손님 위해 낡은 소리 수집하고

박제된 악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래되어 떨어진다

 

그녀 구슬이 한 올 한 올 고성(孤城)의 고요 돌릴 때

여름은 항상 해부되지 않는 웃음으로 다가온다

 

모든 웃음에는 떨리는 구멍이 있다

                                                                                                                          (우이시 제2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