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

작은 놈들의 세상 / 임보

운수재 2008. 1. 13. 10:30

 

 

작은 놈들의 세상 /    임보

 

 

장마철에 뜰에 내려섰더니

잡초들이 마당 가득 돋아나 있었다

호미를 들고 한 서너 시간 실갱이를 하다 지쳐

그만 들어오고 말았다

20여 평 마당에서 겨우 한 둬 평 뽑았을까

다음날 아침 마당에 내려가 보았더니

뽑힌 자리마다 송곳 같은 작은 싹들이

아우성을 치고 다시 돋아나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강릉을 가다 창 밖을 보니

연도의 산들이 벌겋게 마르고 있었다

푸른 소나무 숲들이 불을 맞은 듯

수만 평씩 타 들어 가고 있었다

소나무혹벌레들이 잠식해 간다고 했다

1.5mm~2mm의 작은 벌레들이

온 산천을 홍수처럼 밀어 가고 있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강한 자가 누구인가

힘은 몸뚱이의 크고 작음에 있지 않다

육척거구 씨름꾼 내 친구 한 놈은

젊은 날에 종기를 앓아 세상을 떴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균들과 힘을 겨루다

그들에게 넘어져 먹히고 만 것이다

 

천 년 묵은 아름드리 거목도

백수의 제왕 사자도

그들이 이 지상을 마지막 떠날 때는

저 여리고도 작은 생명체들에게 밟히어

저들의 먹이로 분배되고 마나니

신은 무슨 뜻으로

세상을 갖는 마지막 강자를

그렇게 작은 놈들로 세웠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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