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날아가는 은빛 연못

석천동 일기

운수재 2009. 1. 27. 05:44

 

 

 

석천동(石川洞) 일기 /                      임보

 

 

 

지난 한로(寒露) 다음 휴일이었다.

돌에 미친 몇 사람들이 충북 석천동 골짜기를 찾아갔었는데 병풍산 구비구비 맑은 강가에 돌들은 벌써 다 숨어버리고 진달래 붉은 단풍만 강물을 태우고 있었다.

강가의 빈 집 마당에는 옥수수패들이 떼로 모여 노란 이를 통째로 드러내 놓고 입이 찢어지게 웃어대고, 비탈밭 두렁에는 가을 햇볕에 벌겋게 탄 청둥호박 떼들이 배꼽이 빠지도록 호들갑을 떨며 반가와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돌 찾는 것도 아예 잊어버리고 강가에 주저앉아 장호원 욕쟁이 할멈이 챙겨 싸준 동동주와 생두부 몇 점 놓고 이 풍광 거느리고 한바탕 노니는데

드디어 참다 못해

한 친구가 이빨 고운 옥수수 둬 자루 처녀 목덜미 휘어잡듯 앗아오고

또 한 친구가 능청스런 호박 한 덩이 바람난 과부 엉덩이 굴리듯 몰아왔다.

그러자

개천가 여퀴풀이며, 갯버들, 언덕 위의 쑥부쟁이, 갈대, 뽕나무, 그리고 산비탈의 싸리, 오리나무, 참나무, 다박솔, 할 것 없이 풀이란 풀, 나무란 나무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손과 발을 흔들며 무어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내 옛날 산골서 길들었던 예닐곱 살 적의 그 귀를 다시 세워 종그려 봤더니, 분명히는 알 수 없어도

 

“서울놈들은 참 바보야. 우리 돼지 먹는 걸 먹고 사나봐!”

 

아마 그런 소리들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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