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황소의 뿔

후은시

운수재 2009. 6. 9. 17:02

 

 

 

후은시(後隱詩)/                         임보

 

 

 

후은(後隱)은 내 조부의 아호다.

그가 인제(麟蹄)를 떠나

석곡(石谷) 등구(登龜)의 대나무 숲 속에 자리를 잡고

농로(農老)로 그렇게 한 세상을 마친 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댓 살 적부터 그분 사랑에서

글자를 익히며 살아온 나는

서울 유학을 마칠 때까지도

통 알 수가 없었다.

 

아들도 없이 손자 하나 데불고

자주 섬진강 강바람에

명주 옷자락을 날리시던 그 분

내가 군에서 제대하기 기다렸다가

홀연히 떠나시던

그의 외로운 임종을 지켜보면서도

한평생 숨어 살던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겨울밤

대수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오래 깨어 먹을 가시던 그 분

그런데 어인 일로

그가 내 손에 남기신 묵적(墨蹟)은

단 두 편의 시

그것도 파지에 적어

책갈피에 꽂아 둔 초고인 걸 보면

이렇게 남게 된 것도

당신의 뜻은 아니었던 모양

 

나는 불혹이 넘도록 시를 하면서도

그 분의 유묵 몇 점 못 간직한 것이

두고 두고 서운키만 했는데

오늘 아침 내 나이 천명(天命)에 들면서

이제야 그 분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 등 뒤에 숨어서 소곤대는

그 소리를 비로소 들었다.

지상의 흔적 다 거두어 떠나려 했던

후은(後隱)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겨우 백여 년 내다보고 사는데

수만 년 유유(幽幽) 속에서 소요했던

그 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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