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은시(後隱詩)/ 임보
후은(後隱)은 내 조부의 아호다.
그가 인제(麟蹄)를 떠나
석곡(石谷) 등구(登龜)의 대나무 숲 속에 자리를 잡고
농로(農老)로 그렇게 한 세상을 마친 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댓 살 적부터 그분 사랑에서
글자를 익히며 살아온 나는
서울 유학을 마칠 때까지도
통 알 수가 없었다.
아들도 없이 손자 하나 데불고
자주 섬진강 강바람에
명주 옷자락을 날리시던 그 분
내가 군에서 제대하기 기다렸다가
홀연히 떠나시던
그의 외로운 임종을 지켜보면서도
한평생 숨어 살던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겨울밤
대수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오래 깨어 먹을 가시던 그 분
그런데 어인 일로
그가 내 손에 남기신 묵적(墨蹟)은
단 두 편의 시
그것도 파지에 적어
책갈피에 꽂아 둔 초고인 걸 보면
이렇게 남게 된 것도
당신의 뜻은 아니었던 모양
나는 불혹이 넘도록 시를 하면서도
그 분의 유묵 몇 점 못 간직한 것이
두고 두고 서운키만 했는데
오늘 아침 내 나이 천명(天命)에 들면서
이제야 그 분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 등 뒤에 숨어서 소곤대는
그 소리를 비로소 들었다.
지상의 흔적 다 거두어 떠나려 했던
후은(後隱)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겨우 백여 년 내다보고 사는데
수만 년 유유(幽幽) 속에서 소요했던
그 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