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가 민들레씨에게
林 步
아들아
바람이 오거든 날아라
아직 여린 날개이기는 하지만
주저하지 말고 활짝 펴서 힘차게 날아라
이 어미가 뿌리내린 거치른 땅을
미련없이 버리고 멀리 멀리 날아가거라
그러나 남풍에는 현혹되지 말라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럽고 따스하지만
너를 차가운 북쪽 산비탈로 몰아갈 것이다
북풍이 오거든 때를 잃지 말고
몸을 던져 바람의 고삐를 붙잡으라
비록 그 바람은 차고 거칠지라도
너를 먼 남쪽의 따뜻한 들판에 날라다 줄 것이다.
아들아
살을 에이는 그 북풍이 오거든 말이다
어서 나를 떠나거라
네 날개가 시들어 무디어지기 전에
될수록 높이 솟구쳐 멀리 날아라
가노라면 너의 발아래 강도 흐르고 호수도 고여 있을 것이다
그 강과 호수에 구름이 흐르고 숲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
그 환상의 유혹에 고개를 돌리지 말고 멀리 멀리 날아라
너의 날개가 다 빠지고 너의 몸이 다 젖어 더 날을 수 없을 때
네 눈 앞에 햇볕 따스한 들판이 보이거든 그곳에 내려라
그러나 아들아 거칠은 숲들의 마을은 피하거라
지금은 외롭고 삭막할지라도 인적없는 조용한 들판
우리들의 키보다 낮은 들풀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마을을 찾으라
네가 처음 발붙이기에는 그래도 아직 그들의 인심이 괜찮을 것이다
아들아
네가 처음 발디딘 땅이 물기어린 비옥한 흙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지금껏 비어있는 좋은 땅이 너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말라
이미 자리잡고 있는 이웃들의 틈에 네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아들아 인내와 겸손으로 새로운 이웃들의 이해를 얻도록 해라
어떤 이웃은 너의 발등을 밟고, 너의 등을 밀어내고 너의 팔을 비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만 다 거치른 것은 아니어서
어떤 이웃은 폭풍이 올 때 그들의 품에 너를 감싸주기도 하고
사나운 벌레들이 접근해 올 때 독을 뿜어 그들을 내쫓기도 할 것이다
아들아 네 이웃이 네게 어떻게 대하든
너는 그들을 사랑하며 참고 견디어 튼튼한 뿌리를 내리도록 해라
어느 날 밤 봄비를 맞아 네 키가 나만큼 자라면
다음 날 아침 네 이웃들의 낮은 어깨위에 우뚝 솟아오른 너의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바로 네 이웃에
네 또래의 민들레 아가씨가 방글거리며 웃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들레 아가씨가 주위에 보이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
기다리노라면 내일 아침쯤 아니 언제쯤엔가는
너처럼 그렇게 날아서 네 곁에 내려앉을 것이다
그러거든 아들아 서로 사랑하여라
하늘의 별들이 으스러지도록 사랑하여라
그리하여 너도 어른이 되어 예쁜 민들레씨들을 가지게 되면
나처럼 그렇게 너도 일러주거라
북풍이 오면 어서 멀리 멀리 날아가라고
따뜻한 새 세상 찾아 멀리 멀리 날아가라고
이것이 생명의 길이란다.
--------------(시와시학사, 1994, 林步 시집-『날아가는 은빛연못』 중에서)
<감상>
20대 초반의 대학생 시절부터 고등학교 교사, 화실 운영, 대학 강사 생활을 두루 거치면서 서울 곳곳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젊은 시절을 허비한 뒤에서야 이곳에 정착한 셈이다. 돌이켜보면 고향을 떠나와 40여 년의 서울살이 중 20여 년을 북한산자락에 있는 이곳 쌍문동에 머물고 있으니 이제는 ‘제2의 고향’이라 하겠다.
1991년, 수유리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지내면서 洪海里(시인) 선생님의 소개로 <우이동시인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작업실 용도보다는 화가들과 시인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어울려 술 마시며 즐기는 사랑방 역할이 훨씬 컸다는 기억이다.
이후 많은 선후배 시인들이 내게 본인들의 詩集을 선물하고, 나는 나의 개인전 카탈로그를 전해주곤 했다.
1994년 어느 날, 林步(본명 강홍기) 시인께서 『날아가는 은빛연못』을 건네주셨는데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민들레가 민들레씨에게」라는 시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 무렵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어린 두 딸을 떠올리며 부모의 마음을 대신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학 전에 가정파탄을 겪은 아이들이 평소 독서량이 많아 정서적으로는 다소나마 걱정을 덜었지만, 빈곤한 화가 아빠 입장에서는 늘 안쓰러운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민들레가 민들레씨에게」 시를(‘아들’을 ‘딸’로 바꾸어) 크게 적어 아이들 방에 붙여 주었는데……. 학교에서 돌아와 읽고는 두 아이가 한참동안 많이 울었다는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아이들은 아빠가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려는 것으로 받아들인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학이나 문화센터의 종강시간을 비롯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詩를 소개하면 반응이 뜨겁다. 결혼과 더불어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끝없는 사랑과 애틋한 마음을 담은 詩로 별다른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또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는 당부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미에서 공감을 준다. 단지 좋은 시로 읽히는데 머물지 않고 인생 교육에도 기여를 하는 것이다.
내가 아끼는 책은 제목이 보이지 않게 꽂아두는 습관이 있다. 작업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관심 있는 책을 빌려가곤 했는데, 결국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돌이켜보면 내가 좋아하는 책은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는 이유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요즘에 와서는 내가 아끼는 책은 나만이 볼 수 있도록 감추어 둔다. 바로 『날아가는 은빛연못』도 작업실 서재에서 제목을 볼 수 없도록 꽂혀있는 詩集이다.
그동안 많은 시인들과 어울리며 삶과 인생을 논하기도 하고, 많은 지혜를 얻기도 했다. ‘繪畵는 말없는 詩요, 詩는 말하는 그림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결국 그림도 많은 이야기를 함축된 화면에 담아 전달한다는 의미에서는 결코 시와 다르지 않다.
시와 그림은 가깝고 서로 잘 어울리는 예술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시인의 그림에 대한 상식이나 화가의 시에 대한 상식을 보면 의외로 많은 거리감이 있다는 생각이다. 하기야 서로의 한계가 아니겠는가.
2012년 3월 하순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쌍문동 작업실에서
화가 박 흥 순
*<우이동시인들>의 동인은 이생진, 임보, 홍해리, 채희문 등 네 분이고, 그 밖에 박희진, 이무원, 황도제, 정성수, 오수일, 구순희, 나금숙 시인 등과 자주 어울렸다.
---------2012. 여름. <시산맥>에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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