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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의 <마음학교>

임보의 / 임보 본의 아니게 학교를 하나 열었다. 삼각산 밑, 화계사 길 수유리 시장통 입구에 자리한 낡은 건물이지만 이웃들이 참 아기자기하다. 의 간판을 보며 복도에 들어서면 2층으로 오르는 좌측의 좁은 계단 와 을 지나 그리고 3층의 암자 을 넘어 맨 위 4층에 이르면 천 시인의 사업장 이 있는데 학교이사장인 천 시인이 자신의 업소에 새로 문을 연 학교의 이름을 달았다 왈 《임보 문학관 「마음학교」》다. 내가 매주 화요일 오전에 가서 한 둬 시간쯤 시에 대한 얘기를 지껄이는 곳이다. 학생은 5,6십대의 중늙은이들 몇 교실은 언제나 허전하지만 점심에 부대찌개와 소주 맛이 괜찮아 휴강하는 일이 없다. 그렇게 해서 언제 빛을 보겠느냐고 주위 사람들은 빈정대기도 하지만 놀라지 마시라 인사동에 분교도 있다. ..

신작시 2022.03.09

입춘시

입춘시 임 보 2022년 2월 4일 입춘절 아침을 맞아 내가 쓴 입춘시를 찾아보는데 보이지 않는다 내 한평생 봄에 대한 갈망도 없이 그렇게 무덤덤하게 살았던가 보다 사람들은 매년 입춘절을 맞아 모두들 열심히 立春大吉 建陽多慶 입춘방을 써 붙이고 복을 기원하건만… 오늘은 나도 모처럼 입춘방을 지어 입춘절을 맞이할까 보다 =====================================

신작시 2022.02.04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7 장시 <호메로수>와 시조집 <청산도 유수도 두고>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7 / 임보 ----장시 과 시조집 「천축행」이 수록된 시집은 2016년에 간행된 『산상문답』이지만 이 작품이 실제로 쓰인 것은 한참 오래 전이다. 1998년 8월호 《현대시학》에 발표되었으니 그보다 앞서 씌었을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을 생각하면서 혜초의 구도행을 작품화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공력을 드린 작품이기는 한데 독자들에게 얼마나 감동적으로 가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천축행(天竺行) ―혜초(慧超)의 길 1 해는 돛대의 끝에서 화로를 쏟듯 이글거리고 배는 끓는 바다를 가르며 서(西)으로 미끄러지네 상어의 무리들은 물갈기를 번득이며 달려오고 갈매기 떼들은 긴 부리를 세우고 날아들도다 망망하고 망망한 물의 세상 이 물의 끝은 어디이며 이 물의 그릇은 무엇이란 말인가. ..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6) 장시들(1)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6) / 장시들(1) 임 보 원래 서정시 쓰기를 좋아하는 시인들은 분량이 긴 시 쓰기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나 역시 서사성이 담긴 설화시를 즐겨 쓰기는 했지만 읽기에 부담이 될 정도로 긴 분량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몇 편의 장시(다행시(多行詩)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를 썼다. 「황소의 뿔」(『황소의 뿔』신원, 1990), 「호메로스」(『장닭설법』(시학, 2007) 그리고「천축행」(『산상문답』시학, 2016) 등 세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황소의 뿔」은 병영을 무대로 설정한 이야기인데, 주제는 세상을 병들게 하는 ‘악(惡)’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다. 황소의 뿔 애초에 우리들은 바다를 지키는 순진한 수병들이었다 망대에서 바다를 감시하거나 정찰..

꿈속에서 절구 짜기

꿈속에서 절구(絶句) 짜기 임 보 꿈속에서 절구를 짠다 내가 댓 살 무렵 조부님 슬하에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하면서 교재로 썼던 5언절구집 『추구(推句)』의 첫 구절 ‘天高日月明’을 종횡으로 놓고 시구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天高日月明 高 ? ? ? ? 日 ? ? ? ? 月 ? ? ? ? 明 ? ? ? ? 물음표(?) 자리에 글자를 넣어 시구를 짜는 놀이다 ‘高山淸江長’ 둘째 구를 만들어 넣어 본다 天高日月明 高山淸江長 日淸 ? ? ? 月江 ? ? ? 明長 ? ? ? ‘日淸草葉靑’ 셋째 구를 억지로 짜 본다 天高日月明 高山淸江長 日淸草葉靑 月江葉 ? ? 明長靑 ? ? 그런데 마지막 구를 어떻게 메운다? 한참을 끙끙대다가 ‘月江葉舟行’ ‘달빛 어린 강위를 푸른 잎새 배가 흘러간다’ 시가 됐는지 어쩐지도 모르..

신작시 2021.12.15

치아를 염습하다

치아를 염습하다 임 보 어제 치과에 가서 몇 개 남은 영구치 중 두 개를 뽑아냈다 틀니를 건 동량재였는데 과로를 더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치과를 나오면서 간호사에게 발치한 두 이를 싸달라고 했더니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본다 한평생을 나를 위해 고군분투 헌신한 녀석들인데 그냥 버리고 갈 수야 없지 않는가? 비록 봉분이나 공적비는 못 세울지라도 곁에 두고 함께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진단이 담겼던 투명한 플라스틱 작은 원통 속에 안장하여 책상 곁에 모시다. ======================================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신작시 2021.12.05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5 ----사랑을 다룬 두 편의 독백시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5 임 보 15. 사랑을 다룬 두 편의 독백시 「바우의 탄식」과 「빙옥도」는 시집 『장닭설법』(시학, 2007)에 수록되어 있다. 두 작품 다 성취하지 못한 사랑 얘기를 다루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테마는 ‘사랑’이다. 사랑의 성취도 우리를 황홀케 하지만 성취하지 못한 비련의 안타까움도 우리를 얼마나 흥분케 하는가? 「바우의 탄식」은 소작인인 마름의 아들 바우가 지주의 딸―아씨를 짝사랑하다 쫓겨난 이야기다. 쫓겨난 바우가 성공하여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돌아와 아씨와 재회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전 작품이 바우의 독백만으로 되어 있다. 바우의 탄식 아씨, 나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서른 해 전 어느 동짓달 그믐밤 밤서리 맞으며 도망쳐 갔던 천한 마름의 자식 이 바우놈을 아..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4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4 / 임보 14.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시 본격적으로 사건을 다루는 서사시(敍事詩)라는 장르가 있지만, 분량이 길지 않는 서정시도 짧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어쩌면 이야기 형식이 독자를 설득하는데 더 효과적인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민들레가 민들레 씨에게」(『날아가는 은빛 연못』시와 시학, 1994)의 화자는 엄마 민들레다. 깃을 달고 미지의 세상으로 날아갈 자식 민들레에게 들려주는 당부의 말이다. 이는 작자인 내가 후손들에게 일러주고 싶은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민들레가 민들레씨에게 아들아 바람이 오거든 날아라 아직 여린 날개이기는 하지만 주저하지 말고 활짝 펴서 힘차게 날아라 이 어미가 뿌리내린 거친 땅을 미련 없이 버리고 멀리 멀리 날아가거라 그러나 남풍에는 현혹되..

시의 남상을 돌이켜 보며

시의 남상(濫觴)을 돌이켜 보며 임 보 모든 생명체는 표현의 욕구를 지니고 있다. 동물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식물들도 그들의 의지를 얼마나 영롱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아름다운 자태와 눈부신 빛깔로 꽃을 피워 벌과 나비들을 불러들이는 것을 보면 그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동물들은 각가지 동작과 소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 않던가? 동물들 가운데서도 인간만큼 고도의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드러내는 생명체는 없다. 인간들은 언어를 만들어 의사소통을 자유자재로 한다. 성대를 울려 음성인 말로 소통할 뿐만 아니라, 문자를 만들어 음성언어가 지닌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있다. 인간이 지상의 영장으로 군림하게 된 것은 어쩌면 언어의 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