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구름 위의 다락마을

[선시] 일자

운수재 2007. 3. 17. 10:05

 

일자(一字) /   임보


목계(木溪)라는 자를 만나 며칠 동행할 때의 일이다.

월천(月川) 강가에 이르러 잠시 쉬는데

절벽에 한 자 남짓한 길이의 "―"자가 새겨져 있다.

목계(木溪)의 얘기론

여러 천 년 전에 지나던 초공(草公)의 글이라고 한다.

무슨 뜻인가고 물으니

제대로 다 들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흐르는 물이 끝이 없어 산천이 늘 푸르다"

라고 일러 준다.

다시 한나절을 더 간 뒤 화구(火口)라는 골짜기에서 쉬는데

또한 그 골짝의 절벽에도 一자(字 )한 획이 새겨져 있다.

이번엔 내가 초공(草公)의 글씨를 또 보는구나 했더니

이건 초공(草公)이 아니라 모공(毛公)의 것이라며

"타는 불이 그칠 줄 모르니 하늘이 늘 붉다"

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같은 一자인데 어찌 그리 뜻이 다르단 말인가.

내 마음의 낌새를 알아낸 목계(木溪)는 껄걸 웃으며

같은 사람도 한번 그은 획을 다시 그렇게 할 수 없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만든 그것들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작대기 획 하나로도 천 년을 오르내리면서

서로 긴 얘기들을 그렇게 나눈단 말인가.

초(草)와 모(毛) 중 누가 앞엣분인가 물으니

글의 내용으로 보아

누가 누구의 것을 화답했는지

자기도 가리기 어렵다고 한다.



자연과 시의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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