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구름 위의 다락마을

[선시] 천궁

운수재 2007. 3. 23. 10:28

 

 

천궁(千宮)   /   임보


천궁(千宮)은 기생의 이름이다

수많은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나

그의 집 문턱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어떤 자는 그를 보기 위해

서화(書畵)로 몇 십 년을 기다리기도 하고

어떤 자는 거문고와 술을 익히며

또 그렇게 하기도 한다

곡천(曲川) 고을을 지나다 이 소문을 듣고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그의 집 대문을 두드려 보았다

고대광실이 적절할까

열두 척 높이의 대문이 열리자

연두빛 연못이 앞을 막았다

초립을 쓴 몇 시동들이

연못의 물을 떠서 코앞에 들이대는데

맛을 보았더니 청주였다

마시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다기로

늘어선 놈들의 잔을 들어 마시기를

한나절쯤 했을까

다리는 휘청이고 머리는 아물거렸다

술의 연못에 걸친 외나무 다리를 건너

내실로 들어가는데

대개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주호(酒湖)에 떨어져 허우적대다 되돌아 간다고 한다

다리를 막 건너서자

시녀가 손을 잡아 이끌며

선비의 주량이 대단하십니다고 웃었다

한 방에 안내되었는데

묵향(墨香)이 코를 후볐다

화선지에 붓

아마 서화로 천궁을 흔들어 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붓을 들어 먹을 입히고

종이를 대하나 앞이 아득하다

이 취중에 무엇을 쓰고 무엇을 그린단 말인가



    彼夢此夢皆虛夢
    (이도 꿈 저도 꿈 모두가 다 헛된 꿈)
    汝夢我夢夢中夢
    (너도 꿈 나도 꿈, 꿈 속의 또 꿈이로다)

    날새 한 마리 천공(天空)으로 솟아
    달의 심장을 뚫었네.


라고 써 내려가다 그만 쓰러져 눕고 말았다

누가 흔들어 깨우기에 눈을 떴더니

한 낭자가 웃고 있다

소저는 천궁의 아우이온데

선비님께 현금(玄琴)을 올리라 하여 가져왔나이다

주안상 곁에 삼현(三絃)의 거문고가 놓여 있다

옥배에 녹주를 따라 건네는 품이 한 마리 청학(靑鶴)이다

소리와 거동에 향이 배어 있다

내 악기(樂技)를 보고자 함이렸다

평소 피리 구멍 하나도 만져 보지 못한 자가

어찌 처음 본 삼현(三絃)의 현금(玄琴)을 울릴 수 있단 말인가

난감한 일이로다

허나 어찌할 것인가 실토하는 수밖에

나는 궁우(宮羽)에 원래 손방이니

낭자가 금(琴)을 울려 준다면

못하는 춤이나마 한번 추어

어우러져 보고자 합니다 하니

낭자가 웃으며 현을 고른다



비비(飛飛)
동동(動動)
비동동(飛動動)



이 무슨 현묘한 음색인가

등뼈를 흐르는 전율에 몸을 일으켜

나도 모르게 수족이 춤을 엮는다



무아몽롱(無我朦朧)
부유허공(浮游虛空)
천궁하(千宮何)
천궁하(千宮何)



돌다가 그만 정신을 잃어 넘어지고 말았다

옥그릇들이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주안상을 덮친 모양이다

몇 날이나 지났던가

깨어난 곳은

천궁의 대문 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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