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의 산문

한일수상

운수재 2007. 5. 27. 10:15

 

한일수상(閑日隨想) /  유공희

 

일전에 외출했다가 어느 긴 벽돌담 아래를 지나면서 나는 재미있는 것을 보았다.

벽돌담 한쪽에 새까만 페인트로 엄숙하게 ‘낙서엄금(落書嚴禁)’이라고 대서(大書)해 놓은 바로 그 아래에 5,6세의 어린 아이의 솜씨인 듯한 흰 초크로 그린 천진난만한 인상(人像)이 두셋 유쾌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거리를 걸으면서 흔히 보는 일이지만 ‘이곳에 소변하지 말 것’이라고 써 놓은 자리에는 의례히 지린내가 코를 찌르게 풍기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지만  ‘낙서엄금’ 근처에는 항용 과감하게 인상, 물상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유쾌해진다.

오줌 지린내에 관해서는 요즘 ‘경범처벌법’조차 나와서 단속하고 있으니 언급할 바 못 되나 어린 아이들의 낙서에 대해서는 나는 흥미 있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거리의 벽돌담이나 판자에 낙서 하나 볼 수 없는 도시와, 대문짝이나 벽 위에 아이들의 희화 하나 볼 수 없는 가정이, 잘 다스려지는 도시요, 훌륭한 가정일는지는 모를 일이다.

금칙(禁則)이 잘 준수된다는 것은 훌륭한 일일 것이요, 어른들 말 잘 듣는 아이들이 좋은 아이가 아닐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의 낙서는 낙서가 아니라 실로 그들의 빛나는 조형력(造形力)과 슬기의 발로라는 것을 수염 난 아버지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보고도 그렇게 느낄 때가 많지만 흔히 벌거벗고 모여 노는 네댓 살 난 어린이들의 모양을 볼 때에는 인간의 체구의 됨됨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뉘우칠 때가 많다.

다른 동물들은 충실하게 네 발로 걷는데 인간의 앞발은 어쩌자고 저렇게 땅에서 해방되어 꺼들거리게 되었는가?

생각하자면 당돌한 모양이랄 밖에 없다. 생김생김 자체가 벌써 괘씸하다.

프랑크린은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하되 손으로 도구를 만드는 능력을 들었거니와 상반신에서 꺼들거리는 두 개의 앞발과 어깨 위에 올라앉은 지나치게 큰 대가리는 이미 심상치 않은 생김생김이 아닐 수 없다.

인류는 이와 같이 비범한 모양으로 태어나서 부지런히 ‘일’을 해온 결과 오늘날같이 제 꾀에 제가 넘어가려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지나치게 큰 대가리는 확실히 영광의 본존(本尊)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자칫하면 너무나 그것에만 치중하는 과오를 범한 것 같다.

우리는 놀랍게도 땅에서 해방되어 꺼들거리게 된 앞발을 정당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당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굉장한 배리(背理)가 생기는 점에서 본다면 손은 대가리의 비(比)가 될 수 없다.

손이란 게 본래 ‘일’하는 기관에 그친다는 그러한 오해가 우리의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을 얼마나 덜고 있으며 흐리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일’이란 인간의 본래의 유희본능을 기초로 해서 생겨진 의외의 사건인 것이다.

실러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과잉된 인간의 에너지 곧 유희본능이 없었던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그다지 고맙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 지성의 최초의 징후는 인간의 유희적 호기심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어린이들의 슬기가 그들의 유희 속에서 성숙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누구나 수긍할 일이다.

유명한 교육학자들은 어린이의 교육이란 요컨대 그들의 유희를 교육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어린이와 어른이 다를 리 없다.

‘일’ 잘하게 생긴 한창 때의 중견 어른을 보고 취미를 묻는다 하더라도 매일 매일의 출근이나 정상적으로 하는 일이 취미라고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생활의 흥미는 결코 어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활동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로 ‘쓸 데 없는 활동’에 있는 것이다.

임어당(林語堂)은 “때(時)가 유용한 것은 그 유용하지 않음에 있다”라고 재치 있게 이야기하였거니와 나 자신의 경험으로 말하더라도 꼭 필요한 일만 하고 지낸 날같이 싱거운 날은 없다.

산보의 즐거움은 전혀 걷는 목적이 없는 곳에 있는 것이다.

목적이 없기 때문에 걸으면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100%로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가 그의 수필집 「에피큐르의 정원」에서 말하기를 ‘시인의 권태는 금빛 찬란한 것이다’하 했지만, 시인이 아니라도 한가한 시간을 혼자서는 견딜 수 없게 된 인간은 굉장히 비참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땀을 흘리며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은 거룩한 정경이라고들 하나 확실히 기막힌 속임수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거룩한 태도가 그런 데 있을 리 만무하다.

따뜻한 햇볕을 쪼이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폭삭한 안락의자 위에 이 괘씸하도록 위대한 몸을 눕혀 조용히 담배를 피우며 한나절을 혼자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랴!

어설픈 두뇌만 가지고 인생에 무슨 목적을 붙여 보기 위해서 생활을 버리고 일생을 서재 속에서 마치는 사람이나 돈을 못 벌어 애를 닳는 사람이나 출세를 못 하면 산 것 같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처참하게 동정심이 우러난다.

침략전쟁을 반대하다가 옥사(獄死)한 일본의 우수한 철학자 삼목 청(三木淸)은 ‘여행을 즐겁게 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즐겁게 살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여행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첫째 목적지가 없을 것, 둘째 짐이 없을 것’이라 했다.

김삿갓이 그처럼 인간다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일생을 여행하듯 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행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더구나 요즘 세상에서는 여행을 여행답게 하는 사람은 드물어졌다.

기차 위에 오르고 보면 거개가 짐승 같은 눈을 가진 답답한 사람들이다.

인간 생활에서 가장 즐거운 것은 연애와 식사 다음에는 여행일 터인데 여행을 하면서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것은 확실히 억울한 일이다.

여행의 즐거움은 결코 낯선 산천을 구경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데 있다.

모두 네 것 내 것을 주장하여 다투던 사람들도 여행을 하는 동안만은 다소라도 각종의 목적 달성을 위한 무장을 풀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달 밝은 가을밤 낯선 타인과 차창에 기대어 마주 앉았다 하자.

달이 고와서 인사도 없이 낯선 손님 보고 “참 달이 곱습니다”하고 말을 건넨다 하더라도 상대편 역시 인사도 없이 웃는 얼굴로 “글쎄요. 참 곱구먼요”하고 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순천시 옥천교(玉川橋) 위에서 내가 혼자 달에 취하여 서 있다가 지나가는 신사 한 분을 붙들고 “실례합니다” 이렇게 인사까지 따져가면서 “참 달 밝습니다요” 하고 시흥(詩興)을 나누고자 했다가는 나는 미친 놈 취급을 받을 뿐일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여행하는 기분으로 서로 살아간다면 이 지상이 그렇게 살기 어려운 곳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을 보면 냉전은 인간 상호간에도 있다.

인간 상호가 기막힌 에고이즘으로 무장을 하고 항상 열전(熱戰) 직전에서 허울 좋은 미소를 가장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때로는 언제나 일촉즉발의 표정을 견지하고 사는 사람조차 있다.

나는 참다운 휴머니즘이란 인간이 인간과 생활하는 행복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열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열은 수염 난 어른과 어른과의 거래에서는 보기 드물다.

어린이들의 생활에서 나는 천진 그대로의 아름다운 인간성의 발로를 본다.

그들은 배가 부르고 장난감만 있으면 눈부시도록 지상을 즐기는 것이다.

엄숙한 ‘낙서엄금(落書嚴禁)’ 아래 늘어선 순진한 인상은 이 같은 천진난만한 그들의 지성의 발로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결코 벽에 낙서하지 않는 ‘점잖음’을 영득하였다.

그래서 무엇인가 목적이 있는 활동이 아니면 무가치한 것이라는 상식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용건이 없으면 편지 쓰지 않는 뱃장이 생겨 가고 신성한 회화(會話)는 사무에 관한 것이 아니면 상담(商談) 이란 양식(良識)(?)들을 가지게 되었다.

불건전한 인생관이란 말을 들을지 모르나 나는 인생에는 원래 이렇다 할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살 필요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적인 이유로 자살하는 사람이 왕왕이 있으나 그들은 본래부터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인생에 덤벼든 탓이다.

만일 인생에 이렇다 할 목적이 있다고 하면 인류의 사고(思考)의 역사는 그것을 발견하고도 남으리 만치 엄청난 것이었다.

목적을 탐구하기 위한 철학은 마치 남의 심부름가는 걸음같이 싱겁고 시험공부같이 무미하다.

학생들이 교과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라든지 오피서들이 일요일을 기대하는 이유같이 당연한 것은 없다.

내가 학창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 14년 동안 학비를 마련하시느라고 애를 쓰신 아버지께서 취직할 것을 권하셨을 때 당돌하게도 “이 세상에는 저에게 맞는 직업이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가 ‘건방진 놈’이라고 꾸지람을 들은 일이 있다.

학문이나 교양의 근본 목적이 어떤 직업에 들어맞는 데 있는 것일 리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떤 직업을 붙들기 위해서 배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요즘 학생들은 학문의 본래의 사명에 대하여 안타깝게도 몽매하다.

훌륭한 교양을 쌓는다는 것은 무슨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실로 말할 수 없이 즐겁기 때문이다.

아무리 깊은 학식이라도 인생의 즐거움에 대하여 무감각할 때 그것은 허무한 것이다.

인간의 아름답고 좋은 점은 우리의 어린이들이 고루고루 가지고 있다.

잘 놀지 않는 아이는 귀엽지 않다. 그들이 천사처럼 동무들과 모여 앉아 땅에다 그림을 그려가며 노는 모양은 언제 봐도 즐겁다.

잘 노는 아이의 발가벗은 하루는 아름다운 음악의 일장 같다.

 이렇게 재미있게 놀며 자란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면 땀을 흘려가며 장사를 해야 하고 ‘출세’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천진한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은 염치없는 범절(凡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어린이들로 하여금 인간으로 태어난 커다란 보람 속에서 눈부시게 즐기게 하라.

무계(無稽)한 목적을 교시(敎示)하여 귀중한 일생을 억울한 고역(苦役)으로 인식시키지 않도록 하라. ‘낙서엄금’ 근방의 저 즐거운 인상(人像)이 어찌 빈축의 대상일 수 있으랴. (1955.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