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斷章)]
팔월의 독백 / 유공희
‘나타나에트여 읽은 다음에는 이 책을 팽게쳐라. 그리고 들로 나가거라!’
― 지드 「땅의 양식」
1.
생활하는 생명에는 육체는 벗아날 수 없는 숙명이다. 인간의 자유의사가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해 온 나머지 육체 그 자체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의욕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금단(禁斷)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생활하는 생명이 육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지상의 숙명을 최초의 또한 유일의 행복으로서 인식하는 곳에 생활하는 생명으로서의 가장 노오멀한 자기 파악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육체’를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경원(敬遠)한다.
2.
잘 먹고 잘 마시는 신사들이나 무척 건강을 사랑하는 기운 좋은 젊은이들은 간혹 탐스러운 한 개의 살덩이로 돌아가서 자기의 중량(重量)을 향락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무의미한 중량을 거느리고 세상에 나왔다는 인간의 숙명이 그들에게 결코 비애의 소재가 될 수 없다. 도리어 애매한 중량의 주인공이라는 행복감이 무의식중에 사지(四肢)에 사무쳐 한두 번 체조(體操)에 흡사한 동작까지 연출하게 되는 것이 상례다. 다만 그들은 대개가 너무도 에고이스트이기 때문에 ‘육체’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3.
꽃떨기같이 아름다운 새벽이 밤의 어둠속에서 태어나듯 헤아릴 수 없는 행복의 미명(未明)이 ‘육체’의 암담 속에 잠겨 있다고 우리의 이지(理智)는 생각한다.
또한 하늘과 땅이 향연(饗宴)하는 듯 숨쉬기도 벅찬 현란한 정오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가까운 태양으로부터 마련되듯 완미(完美)한 ‘사상’의 전형을 ‘육체’의 빛나는 온갖 생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우리의 센스는 감득(感得)할 수 있다.
4.
학생시대에 「미(美)의 제전(祭典)」이란 독일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백림에서 열린 올림픽 대회의 실황을 촬영한 것이다. 나는 그 영화의 화면에서나마 느낀 오묘한 인상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흰 구름이 둥둥 떠 있는 코발트의 하늘 아래에서 인간의 육체가 몸부림치면서 경탄(驚歎)할 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무엇인가 모든 ‘정신’적 행위의 전형을 감각한 듯하였다. 뭇 청춘이 의외에도 ‘육체’라는 숙명 속에서 견디기도 힘든 자기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고 그 속에 도취하는 것이다. 다이빙 선수가 다이빙 대 위에서 몇 번 뛰면서 자기의 가능을 시험해 본 듯 보이자 그의 육체는 순간 일체의 포시빌리티를 연소시켜 공중에서 그의 예감과 이상의 전부가 시원스럽게 실현하는데 스스로 놀라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인간의 뛰어난 정신활동의 가장 완미(完美)한 모범의 구현(具現)을 스크린 위에 목도(目睹)하는 듯한 착각을 어쩔 수 없었다. 컴컴한 장내에 관중들의 참지 못할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것을 나는 들었다. 이 영화가 우리를 짝없이 유쾌하게 해 주는 이유같이 정답고 당연한 것은 없다. 정신은 한없는 향수에 젖어 탄식하는 것이었다.
5.
자기의 ‘육체’가 초래하는 모든 요소를 건전하고 아름다운 사상의 내용으로서 생명 본연의 향상(向上)의 모티브로서 비약(飛躍) 지양(止揚)시키는 지혜는 능숙한 스포츠 선수의 체기(體技)에 흡사하지 않은가!
괴테는 얼마나 황홀한 선수이었던가! 『베르테르』는 누구나 다 좋아하고 읽는다. 그러나 그것이 괴테의 ‘육체’의 천재적 소묘(素描)라는 것을 이해하는 이는 드물다. 비련(悲戀)의 아름다움(?)에 함부로 감상(感傷)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베르테르가 롯데를 만나기 전에 얼마나 그의 ‘육체’로부터의 행복의 온갖 관념과 예감에 견디지 못하여 몸부림치는가를 봐야 할 것이다. 베르테르는 그의 ‘육체’로부터 부풀어 오르는 명명(命名)되지 못한 모든 행복에의 계시에 도취한다. 그리하여 ‘묘사(描寫)’하고 ‘기술(記述)’하고 ‘제작(制作)’할 수 있는 이지(理智)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캠퍼스와 화필에는 곰팡이가 핀다. 롯데에의 사랑보다도 먼저 우리는 베르테르, 아니 젊은 괴테의 자연감정 그 천재적 생활감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천재란 그의 풍부한 ‘육체’를 ‘가치’로서 승화시키지 않을 수 없는 화염 같은 생명력을 말함이며, 다시 그 때문에 자기의 ‘육체’에 광인(狂人)처럼 성실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인 감수력을 말함이다.
어리석은 인간은 부질없이 ‘육체’의 노예가 될 뿐이다.
6.
막연하게 ‘육체’의 ‘무게’만을 거느리고 사는 것은 죽음보다도 슬픈 일이다. 죽음― 그것은 사실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는 것이다.
7.
우리는 ‘형자(形姿)’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한 공포를 이해한다. 인간의 조형력(造形力), 형성력 내지는 창조력에 의하여 ‘형자화(形姿化)’되지 못한 모든 인간조건, 번식(繁殖)하는 자연력에 대한 공포― 그것은 심오한 지능의 징표(徵表)이요 인간의 가장 근본적 번민이 아니면 안 된다.
예술이란 ‘육체’의 형자화다.
예술가란 ‘육체’ 내지는 ‘자연’의 협위(脅威)로부터 ‘형자(形姿)’로써 해탈하는 고귀한 인간에의 칭호다. 그가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은 ‘육체’ 내지는 ‘자연’의 번식 팽창이다. 모든 훌륭한 예술가들은 ‘육체’=‘자연’을 형자화했으며 모든 인간고(人間苦)를 ‘형자’의 즐거움으로써 극복했던 것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생활이란 ‘자연’을 죽이고 ‘형자’를 획득하는 활동이다.
8.
‘형자(形姿)’의 즐거움!
생활인이 현실의 생활을 통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형자’에의 연모와 그 즐거움은 의상(衣裳)의 즐거움으로부터 온다. 의상의 즐거움! 얼마나 호사스러운 말이냐! 누구나 옷을 입고 살면서 그 가지가지의 즐거움을 맛보지만 인간의 지고(至高)한 행복이 ‘형자’의 즐거움임을 감득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허영을 무조건하고 배척만 할 게 아니다. 젊은이들의 의상에의 허영은 실로 풍부한 계몽의 대상이라 할 것이다.
‘나형(裸形)’에의 향수가 없는 바 아니다. 우리는 옷을 입고 살아야만 하는 지상의 숙명을 슬퍼할 수 있다. ‘나형’은 본시 파라다이스의 풍속이다. 아담, 이브의 추방 이래 다행히도(?) ‘의상’이란 즐거운 풍속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침… 우리의 지혜가 벌거숭이가 되려고 몸부림칠 때 부챗살처럼 하늘에 햇빛이 퍼질 무렵 조용히 거울 앞에서 단장하며 의상을 갈아입는 여인의 모양, 그것은 신화를 목도하는 듯한 정경이다.
9.
예술가는 먼저 그의 ‘육체’에 충실해야 한다.
빛을 위하여 어둠에 참여하는 것 ‘생활’과 ‘형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에 골몰하는 것― 예술가의 성실은 이렇게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처럼 난해하고 중상(中傷)받기 쉬운 일이다. 예술이란 ‘육체’의 표현인 것이다. ‘육체’로부터 ‘자연’으로부터 ‘형자’를 창조하는 참다운 예술가는 실로 제이의 창조주다.
10.
인간의 조건 다시 말하면 인간성 내지는 ‘육체’의 발로(發露)에 대하여 낡아빠진 윤리의 색안경을 쓰거나 고루한 범절의 틀 안에서 함부로 죄명을 지어내려는 도덕자나 관료는 불행하다. 그는 인간의 ‘육체’를 이해하려 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를 적대시함으로써 터무니없이 태평하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비참하게 ‘육체’에 예속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다. 무희(舞姬) 타이스를 구제하려던 파흐뉴스의 윤락(淪落)같이 불쌍한 것은 없다.
11.
우리는 저 파스칼적인 밤하늘을 우러러보고 칸트가 만끽한 굉장(宏壯)한 관념의 구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그와 같은 밤 침침한 서재 안에서 몸부림치는 노(老) 파우스트의 불안을 더욱 이해한다. 왜냐하면 파우스트 박사가 걷잡을 수 없는 적막에 사로잡혀 자기의 현재까지의 학자로서의 생활에 의혹을 느낀 그 밤이야말로 그의 인간으로서의 참다운 지혜가 빛나던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생명의 본질이 인식에가 아니라 오히려 연소(燃燒)에 있다는 세상에도 당연한 진리를!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황금빛 나는 생활의 수목(樹木)은 항상 푸르다…” 이 메피스토펠레스의 독백은 기실은 괴테 자신의 화려한 아포리즘인 것이다.
우리는 생활로부터 항상 철학으로 돌아오는 내면적 코스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항상 다시 더 고도의 생활로 돌아오지 아니치 못한다. 생명은 연소하는 것이다. 철학은 적막하다!
12.
아무리 큰 격정(激情)이라도 한 구절의 ‘철학’에 의하여 소화되어 버릴 때 우리는 ‘인간’에 절망한다.
인간이 그 무미한 노오멀(normal)로 돌아오지 아니치 못한 곳에서 맛보는 서글픈 적요(寂寥)에는 동정해야 한다.
13.
나르시스는 슬프다. 그는 그의 ‘육체’의 미에 도취한다. 미는 그의 ‘육체’의 영상(影像)에 불과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님프들의 속삭임을 듣지 못한다. 드디어 그는 화석(化石)해 버린다. 가련한 한 떨기의 수선화(水仙花)로….
미는 ‘육체’의 관념에 불과하다. 생활하는 ‘육체’는 부절(不絶)히 ‘희(喜)’를 맛볼 것이다. ‘희(喜)’는 생활하는 ‘육체’의 표현이다. 괴테에 있어서 ‘희’의 추구는 그의 ‘육체’의 필연이었다. 그의 천재는 죽는 순간에도 “오 빛을 더…”라고 화려한 말을 남겼다.
‘육체’는 생활하는 우리들의 모든 행복의 소재다. 그렇다! 그것은 소재일 따름이다. ‘육체’의 노예가 되어 윤락하는 인간 ‘관념’의 종기(腫氣) 때문에 ‘육체’를 화석시켜 버리는 나르시스적 위축(蝟縮) 그것은 모두 얼마나 처연한 살풍경이냐!
14.
‘육체’는 왕왕이 페시미즘의 이유가 되었다. 그릇된 신(神)의 관념, 필요 이상의 야심을 가진 관념, 불연이면 무슨 모노마니아의 탓이다. 온갖 스토이시즘은 얼마나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증오하게 하였는가! 법황(法皇)의 호화스러운 의상은 그 자체가 아이러니의 걸작이다.
인간은 그 ‘육체’라는 숙명에 대하여 이차적으로 지양(止揚)된 이지(理智)의 관조(觀照)가 필요하다. 페시미즘 위에서 오히려 복욱(馥郁)하게 꽃피는 계시(啓示)… 참다운 옵티미즘의 계기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15.
그대의 오묘한 감성은 그대의 몇 걸음의 보행(步行)에서 이미 행복의 예감에 젖으리라. 의상의 즐거움― 아, 그보다도 리듬! 넘쳐흐르는 리듬으로 하여 그대의 육체 속에 충만한 그대의 생명을 감각하라. 실러는 ‘유희(遊戱)’에서 인간의 가장 순수 지고(至高)한 생의 관념을 발견한다고 했지만 숨이 막히는 무용이 아니라도 그대는 하나의 보행에서 그것을 직관하는 감성을 가지라.
16.
붉은 피가 살아서 도는 육체는 가장 완전한 인간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또한 인간이 진실로 버릴 수도 있는 유일의 것 최후의 것이다. 이를테면 생명이 ‘불멸(不滅)’에 돌아가는 순간 흙에 팽개쳐질 빛나는 하나의 ‘허무(虛無)’….
우리는 항상 우리의 ‘육체’를 죽여 버릴 수도 있기 위하여 먼저 항상 우리의 ‘육체’가 굶주리지 않고 건전하게 냄새를 풍겨가며 살아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7.
‘육체’는 지상의 슬픈 숙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숙명 밖에서 지상의 행복을 찾을 길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육체를 지니고 살게 마련해 준 신의 은혜를 감사한다. 우리는 ‘육체’를 지니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우리의 행복을 찬미한다.
18.
그대의 ‘육체’는 무겁다.
그대는 그것이 이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무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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