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의 시

심(蕈) / 유공희

운수재 2007. 8. 25. 07:44

 

 

 

심(蕈) /   유공희

 

 

어느 날 황혼 별이 반짝일 무렵

하얀 못가 모래밭의 미온(微溫)에서 피어난

이것은 슬픈 눈먼 꽃입니다

 

불면 부러질 듯한 이 축축한 모가지는

마을을 떠난 들 한구석 하얀 물가에서

부정(不貞)한 춘심(春心)이 분만한 것입니다

 

황혼 꽃잎들이 쉴 새 없이

물 위에 떨어져 죽더니

별이 반짝일 무렵

하늘에 가득히 별이 빛날 무렵

마을을 떠난 들 한구석에서

어떠한 정욕(情慾)이 알 슬었던 것이오리까!

 

못… 이 애달픈 지구의 눈동자는

저 찬란한 밤하늘과

무슨 남모를 이야기를 속삭였던 것이오리까!

 

아 이것은 영원히 이 땅을 헤매는

숙명의 태아(胎兒)

밤이 오면 못가 하얀 모래밭에서

영원한 상처처럼 몸을 태우는 슬픈 빛깔

 

아 항상 조개알처럼 설움에 젖어

그늘 속에 느껴 울며 살고 있는 목숨

 

이것은 아득한 태고(太古)

별과 한낮에 태어나 이 땅을 헤매며

영원히 늙지 않는 하얀 살덩이

항상 천상의 풍속을 얘기하며

 

밤마다 또하나 다른 비애를 말하고

고달픈 시인이 품에서 죽지 않는

빛나는 나형(裸形)… 비너스의 슬픈 알레고리여!

 

이것은 밤마다 아름다운 백지 위에서

나의 청춘을 쫓는

저 구슬픈 ‘모음(母音)’의 실체입니다

(1942. 9.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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