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은 한 편의 시

이형기의 <낙화> / 목필균

운수재 2007. 10. 12. 07:20

 

李 炯 基 의 <落花>   /   목 필 균

 

마흔이 넘어서서야 나는 배움의 한을 푼 일이 있었다.

여고 시절, 국문과 진학을 꿈꾸어 오던 나는 집안 형편이란 벽에 부딪혀서 2년제이면서 등록금도 싸고, 졸업하면 초등학교 교사로 취업이 보장된 교육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졸업 후, 일찍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허겁지겁 살아오면서 이십대 삼십대를 정신없이 보냈다. 하지만 가슴속에 묻어 둔 문학 소녀의 꿈을 저버리지 못한 채였다. 그러나 사십 고개에 이르렀을 때 나는 건강에 적신호를 만났다. 교육대학이 4년제가 되면서 부족한 학력을 3년 동안 계절대학을 다니면서 늦공부를 마치고, 그야말로 대학원 진학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순간에 나는 대수술을 받아야만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난 너무 허무했다. 그리고 절벽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맛보았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지냈다. 그때는 정말 나의 불행이 남의 행복을 확인시켜준다는 억지를 부리며, 누구의 위로의 말도 가슴에 닿지 않았다. 내 꼬인 마음을 겉으로 내색도 못하면서 남몰래 우울과 두려움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회복기에 있으면서도 나는 이제 남에게 폐를 끼치며 사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착잡했다.

 

그때 내게 찾아온 행운이 있었다. 친구의 권유로 대학원 원서를 넣은 것이 합격된 것이다. 그것도 꿈에 그리던 국어교육과이다. 나이 마흔두 살에 얻은 문학 공부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면접 때 교수님께 공부할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문학개론도 제대로 모른 채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싱싱한 이십 대 처녀들과 공부를 하려니 얼마나 노력을 하였는지 모른다. 밤새 리포트를 쓰고, 일요일도 없이 바쁘게 살아도 나는 회춘한 늙은이처럼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아내, 엄마, 교사, 학생으로서 고단함을 잊은 채 만학의 즐거움을 누렸다.

 

이 시절 나는 문학 강의 시간에 이형기의 ‘낙화(落花)’를 만났다. 너무나 바쁜 일상에서 만난 ‘낙화(落花)’, 죽음에 가까이 접했던 아픔의 시간을 보냈던 내게 조용히 젖어든 ‘낙화(落花)’의 서정적 아름다움에 감동되어 나는 졸업 논문의 테마를 <이형기 詩 연구>로 잡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激情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낙화> 전문

 

대상인 자연을 인간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정조와 복합적인 효용을 드러내는 시적 정취를 보여주기도 하는 <낙화(落花)>는 꽃이 지는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하는 모습처럼 노래한다. 삶과 존재가 조락하고 소멸하는 것이 오히려 ‘성숙’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구현, 시적 정취는 그 시절 죽음을 넘어서서 늦공부에 매달린, 무모하게 들뜬 나의 가슴을 조용히 침잠시켜 준 시(詩)였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인은 꽃이 지는 모습을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으로 보았다. 성숙한 가을 향해 꽃답게 지는 청춘, 난 여기서 죽음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졌던 것이 얼마나 무모한 감상에 지나지 않는지를 보았다.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어떻게든 자기는 살아남을 것 같은 삶에 대한 집착과 남보다 더 갖고 싶은 끝없는 욕심의 소유자인 인간과는 달리 절제된 자연의 섭리를 가시화 시켜준 이 시는 번뇌로 가득 찼던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가야할 때를 분명히 안다는 것은 인간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남을 헐뜯고, 짓밟고 올라서려는 욕망의 끝을 이 시에서는 꽃잎이 떨어지는 장면 하나로 정화시킨 것이다. 사라지는 사물에 대한 애착은 그의 내적 자아를 빈 공간으로 열어 두고 거기에 대상을 받아들여 채워 가는데 그것은 순수성과 맑음의 자아가 외적 세계를 부드럽게 수용하여 거기에 동화되어 가는 심리적 지향으로 드러난다.

이는 점점 현대화 되어가고, 물질화 기계화되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오아시스에서 만난 맑은 물 같은 목축임을 주는 시라고 생각한다.

                                                                                             (우이시 제1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