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배 경 숙
내 빛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막연한 환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운치와 격조, 거기에 걸맞는 도취에의 마력은 강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진한 향기는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끌어가는 숨막히는 포옹이었다.
멀고 어둡고 부드러운 안개 속의 잡히지 않는 몽롱한 그것은 미간을 찌르고 드는 강한 정복의 힘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가끔은 모든 것을 내맡기고 스르르 물결에 떠내려가는 은은한 빛으로 신비를 발산하기도 했다.
환상에의 강한 집착은 가슴과 머리로부터 나를 끌어내지 못하고 들끓는 깊은 심연에서 허우적대는 어둠일 뿐이었다. 나를 향한 나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변화를 갈망하는 날선 욕구는 진정한 용기를 갖지 못한, 수없이 얼크러진 불안과 불신의 광기였던 것일까?
나는 화해를 꿈꾸었다. 나와 너, 믿음과 배반, 자연과 문명,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을 드러내면서 함께 충족을 맛보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끝없이 꿈꾸었다.
화해 그 자체의 순수한 절정들에게 다가가고 가꾸고 글로 쓰고 싶었다. 내 속의 긴장과 갈등들을 풀어냄으로써 나와 세상과 우주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써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나 내면의 울림들이 끊임없이 탈출해 적나라하게 펼쳐지려는 몸부림을 견뎌내야 했다.
시를 쓰는 작업은 늘 낯선 서성임을 요구하는 모험이면서 새로운 변화로 유혹하고 많은 시도를 불가피하게 함으로써 성장의 힘이 되어 주었다. 시는 구원의 기호로써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희열을 안겨주었다.
화해의 순간 순간 전신에 퍼지는 밝은 빛으로 그 주위를 비추는 후광까지 찬란한 기운이길, 벼랑 끝에 잔뜩 핀 꽃들의 그 진한 감흥이길 기도한다.
그리고 가끔은 지나간 순간들을 미처 느끼지 못하고 비추지 못하고 간직하지도 못하고 무심하게 지나치지는 않았나 후회를 한다. 이럴 때면 생명이 시들어 빠져나가는 후덥지근한 쓸쓸함이 전신을 휩싼다.
억압의 빗장을 풀고 모든 사물 앞에서 확대, 확장되며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서기를 고대한다. 이러한 투쟁이 나를 구출할 때 나의 시 쓰기는 빛이며 꽃이 될 것임을, 나를 회복하는 길이 될 것임을 나는 믿고 있다.
나는 가끔 정현종의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중에서 노다지를 뇌인다. 어릴 적 금광을 하다가 잘 지내던 집안이며 그의 인생까지 거덜이 난 노다지꾼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노다지! 충분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압도적이고 마력적인, 불가항력의 일깨움이 아닌가! 이 순간이, 이 물건이 노다지인지도 모른다는 자성의 울림이 화두처럼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우이시 제1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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