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와도같이 / 유공희
어젯밤 밤새도록 병아리 속삭이듯 비가 내리더니
이 아침 얼마나 아름다운 생물들의 단장(端裝)이냐!
모든 나뭇가지에서 상승(上昇)하는 수액(樹液)의 운율에 귀를 기울이며
호들기를 불 줄 아는 이국(異國)의 소년이여!
나는 끌려온 양(羊)이고 가련한 에트랑제지만
또한 알고 있다…알고 있다 행복의 온갖 눈초리를!
저 한 송이 장다리꽃과 꿀벌의 말없는 추구(追求)를…
고달픈 사상(思想)의 그림자는 티끌만치도 없다.
구름쪽같이 …황금빛 모음의 행렬이 나의 오체(五體)의 구석구석에
영원의 여정(旅情)을 속삭인다
오, 이 호수와 같은 정적(靜寂)을 쫓는 태양의 여정(旅情)!
낯서른 땅 낯서른 처마 아래에 핀 하얀 버섯들…
하룻밤에 생긴 조그만 너희들을 애무하려는
나의 열 손가락에 얼켜지는 연정을 누가 아느냐!
나는 원래 소경이고 나는 벙어리지만
낯서른 지붕 밑에서 완전히 축복된 나의 내장(內臟)의 환희를
듣는도다.
나는 끌려온 양(羊)이고 가련한 에트랑제지만
저 바람에 감기는 수양버들 가지에도
저 반짝이는 물결 위에도 이 따뜻한 벽(壁) 아래에도
나는 무지개와도같이
축복된 육체의 순간 순간을 읽는도다.
오, 막막하고 처량한 오늘 이 하늘 아래
어느 거룩한 창조주의 찬물(饌物)이랴!
조형(造形)된 만상(萬象)의 이 꽃 같은 ‘노말’ 위에
이 거대한 미소의 입상(立像) 아래
이 고적한 황금빛의 무인경(無人境)에
나는 가만가만히 앉아보는도다
빈한한 나그네처럼…나그네처럼…
(1946. 3. 24. 吳淞에서)
'유상 유공희의 글 > 유공희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메테의 연정 / 유공희 (0) | 2007.10.26 |
---|---|
두 개의 조개껍질 / 유공희 (0) | 2007.10.04 |
귀뚜라미 / 유공희 (0) | 2007.10.01 |
그대의 하얀 손을 / 유공희 (0) | 2007.09.29 |
향수 1 / 유공희 (0) | 2007.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