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의 시

무지개와도같이 / 유공희

운수재 2007. 10. 22. 07:06

 

 

무지개와도같이 유공희

 

 

어젯밤 밤새도록 병아리 속삭이듯 비가 내리더니

이 아침 얼마나 아름다운 생물들의 단장(端裝)이냐!

모든 나뭇가지에서 상승(上昇)하는 수액(樹液)의 운율에 귀를 기울이며

호들기를 불 줄 아는 이국(異國)의 소년이여!

나는 끌려온 양(羊)이고 가련한 에트랑제지만

또한 알고 있다…알고 있다 행복의 온갖 눈초리를!

저 한 송이 장다리꽃과 꿀벌의 말없는 추구(追求)를…

고달픈 사상(思想)의 그림자는 티끌만치도 없다.

구름쪽같이 …황금빛 모음의 행렬이 나의 오체(五體)의 구석구석에

영원의 여정(旅情)을 속삭인다

오, 이 호수와 같은 정적(靜寂)을 쫓는 태양의 여정(旅情)!

낯서른 땅 낯서른 처마 아래에 핀 하얀 버섯들…

하룻밤에 생긴 조그만 너희들을 애무하려는

나의 열 손가락에 얼켜지는 연정을 누가 아느냐!

나는 원래 소경이고 나는 벙어리지만

낯서른 지붕 밑에서 완전히 축복된 나의 내장(內臟)의 환희를

듣는도다.

나는 끌려온 양(羊)이고 가련한 에트랑제지만

저 바람에 감기는 수양버들 가지에도

저 반짝이는 물결 위에도 이 따뜻한 벽(壁) 아래에도

나는 무지개와도같이

축복된 육체의 순간 순간을 읽는도다.

오, 막막하고 처량한 오늘 이 하늘 아래

어느 거룩한 창조주의 찬물(饌物)이랴!

조형(造形)된 만상(萬象)의 이 꽃 같은 ‘노말’ 위에

이 거대한 미소의 입상(立像) 아래

이 고적한 황금빛의 무인경(無人境)에

나는 가만가만히 앉아보는도다

빈한한 나그네처럼…나그네처럼…

                                   (1946. 3. 24. 吳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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