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곡(蓀谷) 이달(李達) / 조 영 님
이달(1539~1612)은 조선중기 때 당풍(唐風)을 잘 구현한 삼당시인―최경창, 백광훈, 이달―의 한 사람이다. 그의 호는 손곡(蓀谷)이다. 그는 부친 수함(秀咸)과 모친인 홍주의 관기 사이에 태어난 서얼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채 일반 사대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잠시 한이학관(漢吏學官)이란 벼슬을 하긴 했지만 그만두고 오로지 시를 지어 소일하는 초야의 시인으로 살았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전문적 시인이었던 셈이다. 그의 문집인 『손곡집』에 단 한 편의 文도 있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손곡은 詩才 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썼으며 화술과 입심도 대단히 좋았다고 한다. 성격은 천성적으로 자유분방하여 어느 한 곳에 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시인묵객과 수창하였고,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사대부가에 몇 달씩 유숙하면서 연명하였다 한다. 때로 자유분방한 성격과 생활로 인해 천하다는 질시를 면치 못하기도 하였다. 손곡은 당대의 유수한 사대부 즉, 양사언, 서익, 고경명, 이수광 등과 교류를 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허균, 난설헌 남매는 손곡의 詩弟子이기도 하며, 허균에게 문학적 영향력을 미친 가장 유력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허균은 손곡의 사후 「蓀谷山人傳」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어유야담』에 실려 전하는 다음의 이야기가 있다.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최경창이 전라도 무장 현감으로 있을 때 이달이 찾아가 며칠을 묵었는데 그 때 좋아지내게 된 기생이 비단 파는 것을 보고 사고 싶어하자 ‘장사치가 강남 저자에서 비단을 파는데, 아침 햇살이 비쳐 붉은 연기가 서렸구나. 가인이 치마 한 벌 사달라고 졸라대지만, 주머니를 뒤져보니 돈 한푼이 없구려’라고 시를 써서 최경창에게 보내었다. 이에 최경창이 답하기를 ‘만약 이 시의 값을 따진다면 어찌 천금만 되겠는가? 쇠락한 이 고을에 돈이 넉넉하지 못하여 그 값을 제대로 쳐주지 못하고 1구에 백미 10석씩 계산하여 도합 40석을 보낸다’고 하였다 한다. 최경창이 이달의 재능을 높이 사 대우하여줌도 이야기 거리이겠으나 이달의 주가는 이 일화로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이달은 아내와 자식을 떠나 평생을 유랑하다가 말년에는 평양에서 객사하는 불우한 삶을 마쳤다. 시는 그가 살아온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던가? 이달의 시에는 외로움과 한, 고독함, 이별의 슬픔, 아픔 등 비애적 정조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다음의 시 「畵鶴」을 감상하여 보자.
외론 학 먼 하늘 바라보면서 獨鶴望遙空
차운 밤 외발로 서 있구나 夜寒擧一足
가을 바람 싸느라니 대숲에 우는데 西風苦竹叢
온 몸 찬이슬에 젖어 있구나 滿身秋露滴
학의 그림을 보고 지은 제화시이다. 여기서 학은 뛰어난 시적 재능을 지녔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평생을 울분과 한으로 보내야 했던 이달 자신의 자화상인 듯하다.
다음은 오언절구 「불일암 인운 스님에게 : 佛日庵贈因雲釋」를 보자.
절집이라 구름에 묻혀 살기로 寺在白雲中
구름이라 스님은 쓸지를 않아 白雲僧不掃
객이 와서야 문 열어보니 客來門始開
온 골짝의 송화 하마 쇴구려 萬壑松花老
이 시의 시적 소재인 백운, 스님, 나그네, 송화가 빚어내는 분위기는 담박하고 정적이면서 스님의 높은 도의 경지를 드러내 주고 있다. 백운이라 하였으니 사람의 자취가 끊어진 깊은 산 속에 사는 스님은 봄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른 채 수도에 몰입하고 있다. 나그네가 와서야 비로소 문 열어보고 어느새 온 골짜기의 송화가 쇠었음을 안 것이다. 문 밖 송홧가루가 날리는 봄날의 풍광은 스님의 격절된 세계와는 상반된다. 그러나 닫힌 문과 열린 문의 차이가 스님에게 있을까? 정적인 분위기가 동적 분위기로 화한다고 변하는 것이 있을까? 오히려 누군가로 인해 열려진 문 밖의 세계와의 소통을 통해서 스님의 항상심은 더욱 고조되는 듯 보인다. 이 각각의 소재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이것과 저것의 구분도 없이 하나로 통합되어 존재하는 듯하다. 즉 동정(動靜), 순간과 영원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구름을 쓸지 않는다는 언표 속에 세속적 부침과는 무관한 초월적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하고 있다.
당시가 송시와 비교하여 논리보다는 흥취와 정감을 그리고 설명보다는 함축적인 표현이 많은 것이 그 특징이라면 바로 위의 시가 당시를 잘 구현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다음의 시는 시적 분위기가 사뭇 다른 「보리를 베는 노래 : 刈麥謠」이다.
田家少婦無夜食 농가의 젊은 아낙은 저녁 때거리가 없어
雨中刈麥林中歸 빗속에 보리를 베어 숲 속에서 돌아오네
生薪帶濕烟不起 생나무 축축하게 젖어 연기가 일지 않는데
入門兒女啼牽衣 문에 들어서니 아들 딸이 옷자락을 잡으며 우누나.
위의 시는 농가의 궁핍한 생활을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당장 저녁에 먹을거리가 없어서 들에서 수확하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베러가는 젊은 아낙의 모습과 마르지 않은 생나무를 지피려니 연기조차 일지 않는 서글픈 상황에 배고프다고 보채는 어린 자식의 모습에서 이 시는 비참한 농가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다. 악다구니같이 모진 생활력을 가지지 못할 듯한 젊은 아낙과 어린 자식의 등장 그리고 雨中, 生薪의 어휘는 비참한 이미지를 배가시키고 있다. 허균 역시 이 시에 대하여 ‘시골집에서 먹을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려내었다’고 평한 바 있다. 평생에 걸친 외롭고 고단한 유랑생활은 이달로 하여금 백성들의 삶의 애환을 이렇듯 핍진하게 그릴 수 있게 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달은 문학사에서 당풍을 가장 잘 구현한 시인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러나 송풍이니 당풍이니 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그의 시에는 수준 높은 격조성과 고절함이 있으니 감상해 봄직하다.
(우이시 제1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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