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한담(漢詩閑談)

옥봉 백광훈 / 조영님

운수재 2007. 11. 21. 14:21

 

 

 

玉峯 白光勳 조 영 님

 

 

백광훈(1537~1582)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시인으로 호는 옥봉이며 전남 장흥 출신이다. 옥봉은 이달 최경창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5언 절구를 잘 지어 호남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옥봉의 가계는 한미한 가문이었으나 옥봉 당대에 이르러서 문장가를 배출하였으니 유명한 「관서별곡」의 작가인 光弘이 그의 형이 된다. 또한 그의 4형제 즉 光弘, 光顔, 光城이 모두 시서에 능하여 ‘世稱一門四文章’으로 이름났었다. 옥봉은 시인이라는 이력을 제외하면 관력은 대단치 않았다.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전원에 은거하며 살다가 41세에 선릉참봉이라는 미관말직에 나아가게 되는데 이는 순전히 경제적 궁핍 때문이었다. 옥봉은 당대의 문장가인 양응정과 노수신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특히 그의 나이 36세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로 제술관이 되어 시재와 서필로써 명나라 사신이 옥봉을 ‘백노선생’이라 칭찬케 하였다. 이로 인해 문명이 더욱 드러났다고 한다. 일찍이 황현은 우리나라의 제가시를 읽고 지은 「讀國諸家詩」 14수에 옥봉을 두고 ‘일대의 호남 백광훈이지만/십년 동안 아전이라 큰 뜻은 펴지 못했네./워낙에 고사를 쓰지 않아도 의젓함 앞서/오언절구는 천추의 호젓한 조종이 되었네’라고 평한 바 있다. 사람들은 옥봉의 시를 높이 평가할 뿐 아니라 그의 행실과 심성 역시 금같이 정련되었고 옥같이 맑고 고아하였다고 한다. 또한 필법은 왕희지에 가까웠으며 초서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어우야담』에는 옥봉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옥봉이 부여를 지날 때에 부여 현감이 기생을 불러놓고 연회를 준비해 그를 맞이했다. 백광훈이 도착하여 보니 호남의 제일가는 시인이라는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시골 선비 차림에 얼굴은 못 생기고 풍채도 보잘 것이 없었다. 우스개 소리를 잘 하는 어느 기생이 ‘전에 백광훈이라는 이름을 태산보다 더 높게 들었는데 지금 만나보니 조룡대밖에 되지 않네요’라고 했다. 부여 백마강에 조룡대가 있는데 이 조룡대란 소정방이 백마를 잡아 미끼로 하여 용을 낚시로 잡은 곳을 말하는 것이니 강 가운데 툭 불거져 나온 조그마한 바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 그 기생의 말이 ‘백광훈을 정말 제대로 그려낸 말이다’라고 했다한다. 옥봉의 뛰어난 시에 비해 용모는 과히 출중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제 옥봉의 「용문산에서 봄을 바라보며(龍文春望)」를 감상하여 보자.

 

나날이 창밖에 기대어 무슨 약속이나 있는 듯   日日軒窓似有期

일찍이 주렴을 걷고 내리기는 늦게야 하네.      捲簾時早下簾遲

봄빛은 바로 봉우리 절에 있다만                     春光正在峯頭寺

꽃 너머 돌아가는 스님 알지 못하는구려.          花外歸僧自不知

 

봄을 기다리는 설레임이 시 전반부에 무르녹아 있다. 시인은 날마다 창밖에 기대어 저 먼 산을 바라본다. 마치 약속한 님이 혹여 오늘은 오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기다리는 그 마음은 아침저녁 발을 걷고 내리는 시인의 자세에서도 드러난다. 이른 아침부터 손님이 오실새라 주렴을 일찍 걷어 놓고 기다리다가 혹시 저녁 늦게 오실까 주렴을 늦게 내린다고 하였다. 주렴은 창을 가리는 대발이지만 창의 의미로 보아도 무방하다. 무엇인가를 애타게 간절하게 그리고 설레임과 기대감을 가지고 고대하는 마음자리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정인을 기다리듯 하던 봄은 눈앞에 보이는 저 용문산 봉우리 절에까지 와 있다. 산봉우리에 봄기운이 자욱할 뿐 아니라 더러는 이른 봄꽃이 피어 붉은 빛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용문산 절에 계신 스님은 봄이 온 줄을 알지 못한다. 봄이 온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봄이 온 것이 외물에 상관치 않는 스님과 도대체 무관하다는 것인지. 봄을 맞는 시인의 설렘과 이미 들어온 봄에 아랑곳하지 않는 스님이 대비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래서 옥봉의 시를 담박하다고 하는가 보다. 또한 옥봉의 시에는 여유와 넉넉함이 있다. 또 아래 시에서 보이듯 그는 다정다감한 시인이다. 5언 절구 「양천유에게 부치다(寄梁天維)」이다.

 

간밤 남산에서 술마시다가                      昨日南山飮

술에 취해 그대의 시에 화답하지 못했소  君詩醉未酬

깨어보니 꽃이 손에 있는데                     覺來花在手

나비가 나처럼 시름겨워하는구려            蛺蝶伴人愁

 

옥봉은 거의 평생을 산수간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짓고 흥취를 즐기며 살았다. 지난밤에 허물없는 벗 양천유를 만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술에 너무 취해 벗의 시에 미처 화답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술을 깨보니 시인의 손에는 꽃가지가 쥐어져 있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친구를 두고 가려니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벗이 넌지시 꽃가지를 손에 쥐어주고 간 것인가? 그렇다면 꽃은 벗의 마음이었구나. 꺾여진 꽃향기를 좇아 나비가 날아왔건만 꽃은 어느새 시들어 버렸다. 시든 꽃에 앉은 나비 마치도 내 마음처럼 시름겨워하는 것 같다. 벗을 만나 흥겹게 술 마시고 수창도 하는 자리에 어쩌다가 주책같이 만취해서 쓰러졌단 말인가? 벗의 시에 화답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며 문이며 그림이며 글자는 모두 예인의 흉중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들이 어찌 모두 위대하며 원대한 것만을 그리겠는가? 또 그러한 것만을 주장한다면 감칠맛이 없을 것이다. 소소하게 돌아가는 인생의 이런저런 모습을 다 담아내는 것이 예술인 것이다. 또한 담아내는 것만이 예술은 더더욱 아닐 게다. 그 속에 시인의 情이 녹아있어야 한다. 특히 한시에서는 情과 景의 혼융을 중요하게 여겼다. 솜씨 있는 시인은 정 속에 경이 있고, 경 속에 정이 녹아들게 한다. 바로 위의 시 후반구가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우이시 제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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