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황소의 뿔

분노의 바다

운수재 2009. 6. 15. 08:27

 

 

 

분노의 바다/                          임보

 

 

 

하나의 여린 빗방울이

뜨겁게 단 아스팔트 포도 위에

떨어져 내릴 때

그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기화해 가는가?

우리는 그것을 보고

물방울은 약하다고

갈대보다 더 연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그릇된 생각인가를

한여름의 소나기를 맞으며

우리는 뉘우치게 된다.

떨어지는 동료들의 뒤를 좇아

한 치의 거부와 주저도 없이

추락하고 추락하여

몸뚱이를 으깨어 대지를 두드리는

저 순열의 빗방울들을 보라

그들은 작은 몸뚱이를 모아

드디어 끓어오른 포도를 식히고

메마른 지상의 수목들에게

생명을 베푸나니

 

그래도 믿기지 않거든

강가로 가 보라

홍수로 범람하는 강가에 서서

그 성난 물결의 아우성들을 들어 보라

그 여린 한 방울 한 방울

그 차갑고 투명한 육체 속 어디에

저렇게 무서운 포효와 힘을

어떻게 간직하고 있었던가?

 

그래도 아직

물의 무서움을 모르겠거든

바다로 가 보라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변에 서서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오르며

그대를 향해 미친 듯 달려드는

그 거대한 파도를 보라

그대는 드디어 물의 위대한 권능에

무릎을 꿇게 되리라.

 

그런데 나는

그 물보다도 무섭고 거센 것이

이 지상에 숨어 있는 것을

1987년 7월 9일 아침에 보았다

한 젊은 주검을 에워싸고

연세대학 자유의 광장에

개미새끼들처럼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물방울들은

시내가 되고 강물을 이루어

드디어 흐르기 시작했다

신촌 로타리로, 아현동으로

서소문으로, 시청 앞으로

강물은 노도로 흘러 바다가 되었다

 

골목과 골목마다

옥상과 옥상마다

파도치는 사람들의 물결로

도로가 가라앉고

고층 건물들이 기우는 것을 보았다

황금빛 한 주검의 배를 띄우고 흘러가는

그것은 슬픔의 바다가 아니라

분노의 바다였다

연민의 바다가 아니라

정의의 바다

아니 그것은

노아의 홍수보다 무서운

민주의 바다 신의 심판이었다

누가 저 어린 학생들

우리들의 아들 딸들을

약하다 이르는가?

누가 저 선량한 민초들을

어리석다 하는가?

 

시청 앞에 고인

억만 인파의 바다는

다시 서서히 움직여

경부 고속도로로

호남 고속도로로 흘러

광주의 무등산 밑까지 흔근히 적시며

황금빛 한 주검을 업고

파도치는 것을 보았다

아니

을지로로, 청계천으로

영등포로, 구파발로

저 상계동 산비탈 골목에까지

소리 없이 스며들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바다가 휩쓸고 간 뒤

태평로 길가에 주저앉아서

그 파도가 남겨놓고 간 체취

바다보다 짙은 냄새를 맡으며

저 태평양의 파도도 깨지 못했던

내 가슴이

무너져 내림을 보았다.

젖은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무엇이 물보다 무서운 것인가를

비로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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