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구름 위의 다락마을

[선시] 지두

운수재 2007. 4. 2. 07:20


지두(指頭)  /   임보




방학동(放鶴洞)은 산수(山水)가 맑아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동구 앞에 이르니

몇 사람들이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놓고

떠들석하니 자랑들이다

붓쟁이 외치기를

좋은 글은 좋은 붓에서 나온다며

청모록필(靑毛鹿筆)을 들어 햇볕에 펼쳐 보이자

진청(眞靑)의 모발(毛髮)에 윤기가 반짝인다

먹쟁이 이어받기를

좋은 먹이 없이는 좋은 붓이 살 수 없습니다며

단연송묵(丹烟松墨)을 들어 흔들어 보이니

먹의 매운 향이 바람결에 벌써 묻어 난다.

그 뒤를 벼루쟁이 또한 일어나서

좋은 벼루가 없고서야 어찌 좋은 먹을 갈 수 있겠는가

자옥용연(紫玉龍硯)의 뚜껑을 열어 보이니

붉은 옥을 뚫고 꿈틀거리는 용이 금방

하늘로 솟아오를 것만 같다

그러자 맨 마지막에 종이쟁이 일어나 웃으며 이르기를

이들이 제 아무리 천하 보배라도

좋은 종이가 없고서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황태봉지(黃苔鳳紙)를 들어 허공에 펼치니

봉황(鳳凰)의 무늬가 담긴 담황(淡黃)의 화선지(畵宣紙)가

비단처럼 너울거린다

선비님

선비님

하나 골라 보십시오

붓쟁이가 그의 곁에서 한참 지켜보고 서 있는

한 선비의 소매를 끌자

그 선비 고개를 흔든다

내게는 다 소용없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호리병 속에

그의 엄지 손가락을 밀어 넣더니

길가의 돌 위에 푸른 획을 하나 그었다

지두필법(指頭筆法)이다

네 사람들이 혀를 널름대며 갑자기 숙연해 진다.






자연과 시의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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