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두(指頭) / 임보
방학동(放鶴洞)은 산수(山水)가 맑아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동구 앞에 이르니
몇 사람들이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놓고
떠들석하니 자랑들이다
붓쟁이 외치기를
좋은 글은 좋은 붓에서 나온다며
청모록필(靑毛鹿筆)을 들어 햇볕에 펼쳐 보이자
진청(眞靑)의 모발(毛髮)에 윤기가 반짝인다
먹쟁이 이어받기를
좋은 먹이 없이는 좋은 붓이 살 수 없습니다며
단연송묵(丹烟松墨)을 들어 흔들어 보이니
먹의 매운 향이 바람결에 벌써 묻어 난다.
그 뒤를 벼루쟁이 또한 일어나서
좋은 벼루가 없고서야 어찌 좋은 먹을 갈 수 있겠는가
자옥용연(紫玉龍硯)의 뚜껑을 열어 보이니
붉은 옥을 뚫고 꿈틀거리는 용이 금방
하늘로 솟아오를 것만 같다
그러자 맨 마지막에 종이쟁이 일어나 웃으며 이르기를
이들이 제 아무리 천하 보배라도
좋은 종이가 없고서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황태봉지(黃苔鳳紙)를 들어 허공에 펼치니
봉황(鳳凰)의 무늬가 담긴 담황(淡黃)의 화선지(畵宣紙)가
비단처럼 너울거린다
선비님
선비님
하나 골라 보십시오
붓쟁이가 그의 곁에서 한참 지켜보고 서 있는
한 선비의 소매를 끌자
그 선비 고개를 흔든다
내게는 다 소용없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호리병 속에
그의 엄지 손가락을 밀어 넣더니
길가의 돌 위에 푸른 획을 하나 그었다
지두필법(指頭筆法)이다
네 사람들이 혀를 널름대며 갑자기 숙연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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