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명시 감상

원천석의 <의고(擬古)> / 임보

운수재 2007. 6. 23. 05:13

 

원천석의 「의고(擬古)」/   임보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1330~?)은 고려 말에서부터 조선조에 걸쳐 생존했던 은사다.

원주의 치악산에 한평생 묻혀 제자들이나 가르치며 시를 벗 삼고 살았다.

군역(軍役)을 피하기 위해 국자감시에 급제하여 진사를 얻은 것 외에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이방원이 일찍이 그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왕위에 오른 뒤 그를 모셔가기 위해 치악산을 찾았다고 한다.

 이를 미리 안 원천석은 치악산 준령의 변암(弁巖)으로 몸을 숨기면서 강가에서 빨래하던 노파에게 이르기를 누가 찾아와 내 가는 길을 묻거든 반대편을 일러주라고 당부했다.

이윽고 노파는 찾아오는 태종의 일행에게 원천석의 당부대로 거짓 일러준 다음, 임금을 속인 죄를 사하려 강물에 투신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이 그 물을 ‘구연(嫗淵)’ 혹은 ‘노구연(老嫗淵)’이라 하며, 태종이 잠시 쉬어 간 곳을 ‘태종대(太宗臺)’라 부른다고 한다.

험준한 바위인 변암에는 사람이 기거할 만한 굴이 있는데 그 굴속엔 ‘암반에 우물을 파서 갈증을 면하고 산채를 거두어 시장기를 달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어쩌면 원곡이 새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찾아가 보고 싶은데 아직 벼르기만 하고 있다.

원곡은 산속에 그냥 은거해 지내는 단순한 은일지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준엄한 눈으로 세상을 굽어보면서 여섯 권의 『야사(野史)』를 기록했다.

그런데 그의 후손들이 필화의 후환을 두려워하여 『야사』를 소각했다고 하니 그의 필치가 당대의 의롭지 못한 정권을 얼마나 준열하게 비판했던가 짐작이 간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여 년이 지난 1603년경 강원도 관찰사 박동량(朴東亮)에 의해 그의 글 일부가 세상에 비로소 드러난다.

다시 200년이 지난 1800년경에 그의 후손들에 의해 간행된『운곡시사(耘谷詩史)』에는 1144수의 시가 실려 있다.

그 동안 적지 않은 시고(詩稿)들이 인멸된 것으로 보이니 애초에 얼마나 많은 작품을 썼던가 헤아리기 쉽지 않다.

다음의 한시「의고(擬古)」는 그의 삶을 단적으로 엿보게 하는 수작이다.

 

곡구의 정자진*이/ 몸소 김매고 밭을 갈았었지/

십 년 동안 바윗돌 밑에서/ 누구와 더불어 이웃하고 살았던가.

영특하다는 이름이 서울에 날렸으니/ 꽃다운 그 자취를 천고에 사모하네./

연기와 노을 속에 늙어 가는 한 선비는/ 새나 짐승과 벗 삼고 지내네./

마음 한가해 얻고 잃을 것도 없는 데다/ 도가 곧으니 어찌 굽히고 펴랴./

때때로 바람과 달이나 즐기면서/ 글쓰기만 끝내면 맑은 시가 새롭네.

―「옛 시를 본받아 짓다」허경진 역

 

谷口鄭子眞, 耕耘躬自親.

十年巖石下, 誰與爲其隣.

英名動京洛, 千古慕芳塵.

煙霞老一士, 鳥獸可同倫.

心閑無得失, 道直何屈伸.

時時弄風月, 脫藁淸詩新. ―「擬古」

 

앞의 6행은 정자진(鄭子眞)에 대한 예찬이고 뒤의 6행은 화자 자신을 노래한 것이다.

『한서』고사전(高士傳)에 의하면 정자진은 한나라 사람으로 홀로 곡구(谷口)라는 곳에서 밭을 갈며 조용히 도를 닦고 지냈던 은사다.

성제(成帝) 때에 대장군 왕봉(王鳳)이 예를 갖추어 그를 초빙했지만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곡구에서 밭 갈며 글을 읽었기에 그의 호를 곡구자진이라고 했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정자진은 밭을 갈며 홀로 산골에 묻혀 사람들과의 교류도 없이 고고하게 지냈다. 그런데 그의 높은 인품이 장안에까지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두고 두고 후세에 길이 전하니 이 아니 흠모할 일이 아닌가?

나도 뭇 짐승들과 더불어 자연 속에서 늙어가면서 욕심 없이 살아가니 얻고 잃음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내 마음의 심지가 곧으니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이 있을까 보냐.

때때로 풍월을 즐기면서 이를 글로 옮기면 맑은 시가 되는구나.

 

이 시에서 정자진을 거론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정자진과 같은 은사라는 사실을, 아니 정자진에 못지않은 맑은 선비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10년 은거의 정자진이 평생을 은거한 운곡과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를 한 다음에 원곡을 초청했더니 그때는 응했다는 얘기가 전하기도 한다.

아는 사람이 권력의 주변에만 있어도 그의 덕을 보려 안달인 것이 세상 사람의 욕심인데 임금의 후원을 입을 수 있는 그가 스스로 그 기회를 거절하고 산속에 묻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맑고 고고한 뜻을 지닌 선비들이 오늘날에도 어느 곳에 혹 숨어있는지 그 소식이 묘연키만 하다.

(우리시 200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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