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스승/ 임보
온 세상이 깊은 눈 속에 묻혔을 때
그분은 홀로 이 세상을 뜨셨다
1952년 어느 봄날
전라남도 승주군 주암면 창촌리 산골에
짙은 갈색 안경에 검은 베레모를 쓴
바람의 신 같은 젊은 사내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아무 물정도 모르는
열네 살의 어린 한 소년에게 바람을 넣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을 지닌 사람이 누군 줄 아느냐?
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군도 아니고
억만 금을 거머쥔 거부도 아니고
천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제왕도 아니고
한 자루의 아름다운 펜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소년의 황량한 가슴에 매일 종균을 뿌렸다
소년은 드디어 '글의 병'을 앓으며 고향을 떠났다
읍으로, 큰 도시로, 다시 먼 서울로 떠돌며
거센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언제나 한 자루의 펜을 삿대처럼 쥐고 있었다
청년을 지나고 장년을 넘어 드디어
아홉 권의 시집을 가진 중견 시인이 되었다
어느 날
늙은 소년은 아홉 권의 시집을 들고
바람의 스승을 찾아갔다
도대체 이것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 산야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숲들을 보라
저 아름드리의 거목들도 애초의 시작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씨들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느냐
그것들이 수많은 계절들이 흐르는 동안 자라고 자라
거대한 수목들로 지상을 저렇게 덮고 있구나
네가 세상에 뿌린 시의 종자들도
어느 이름 모를 사람들의 가슴속에 뿌리를 내려
말없이 자라고 있으리라
그리고, 바람의 스승은 갔다
막상 당신은 한 권의 시집도 이 지상에 남겨 놓지 않은 채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무명의 한 문학애호가로
한평생 시골에 묻혀 살다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어느 겨울 밤
온 세상이 깊은 눈 속에 묻혔을 때 바람처럼 갔다
한 소년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시의 나무를 한 그루 심어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