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746

유급

유급(留級) 임 보 금방 저승에 온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염라대왕께서 이르시기를 한평생 가장 많이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 뭣인지 한 단어로 적어 내라고 했다 어떤 녀석은 ‘돈’이라고 적고 어떤 녀석은 ‘여자’라고 적고 그런가 하면 ‘부모’라고 쓰는 자도 있고 ‘나라’라고 쓰는 자도 있다 그런데 괴죄죄한 한 녀석은 ‘시’라고 써놓고 멍청히 앉아 있다 적어낸 단어들을 가지고 심판을 하는데 무간지옥에 떨어질 놈은 ‘나라’라고 쓴 자다 그놈이 가장 큰 도둑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세상으로 다시 쫓겨날 놈은 ‘시’라고 쓴 자라는데 이유인즉슨 아직 세상 물정 모르니 다시 익혀 오라는 ‘유급(留級)’이라지 않는가!

신작시 2020.10.14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 임보 . 나란 어떤 존재인가 파고 또 파도 . 무궁한 우주 속에 좁쌀알 하나로세 . 아득한 이 사바 어떻게 건너가나 . 미련도 욕심도 다 떨쳐 내버리고 . 타고 또 타는 이 마음 부여안고 . 불전에 엎드려 흐느끼며 기원하네 . . ------------------------------------- * ‘나무아미타불’을 두운(頭韻)으로 하여 작품을 만들어 보라는 한 페친의 요청으로 이 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신작시 2020.09.15

어느 숙연한 최후

어느 숙연한 최후 임보 아무리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죽음으로 속죄한 이에겐 돌을 던질 일이 아니다 그대는 얼마나 정직하게 살았는가? 그대는 얼마나 정의롭게 살았는가? 목숨을 내놓는 일은 온 세상을 버리는 일 그보다 더 큰 참회가 어디 있으며 그보다 더 무거운 형벌이 어디 있으랴? 그 결단의 순간이여, 얼마나 아스라한가! 죄도 아무나 못 짓지만 죽음도 아무나 못 안는다 북한산 성벽에 올라 한밤에 홀로 떠나간 이여! 2020년 7월 9일 자정 세상이 한 인물을 잃었다! ---------------------------------------- *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을 애도하며

신작시 2020.09.05

자문

자문(諮問) 임 보 아내가 마트에서 산 물건들이 집에 배달되었다 배달된 상품들을 확인하던 아내가 식용유가 한 병 더 왔다며 어떻게 해야 할까를 내게 묻는다 “돌려줘야지!” 무심코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아내는 2층에 올라가 딸에게 다시 자문을 구한 뒤 내려오더니 “그냥 두라는데?” 딸의 대답을 전한다 권사님 생각도 딸과 다르지 않는 걸 괜히 내가 번거롭게만 한 것 같다. ======================================== * 2020. 9월호

신작시 2020.08.30

입적

입적(入寂) 임 보 임보 아침에 일어나 봤더니 내 방 창밖의 방충망에 웬 십자가 하나 걸려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잠자리 한 분 붙어 계시다 창을 열었는데도 미동도 없이 명상 중이다 고행의 날개를 쉬고 있는 걸까? 중생의 고뇌를 사해 달라는 기도 중일까? 언제부터 그렇게 매달려 있는지 아침밥을 먹고 나서 다시 봐도 그대로다 천정에 매달린 전등이 신기한 것일까? 내 골방의 책들이 궁금한 것일까? 아니면 이 방의 주인이 불가사의하다는 걸까? 저 손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참 막막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허공 입적(入寂)에 드신 게 아닌가! ============================================== * 2020년 9월호

신작시 2020.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