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746

꿈속에서 절구 짜기

꿈속에서 절구(絶句) 짜기 임 보 꿈속에서 절구를 짠다 내가 댓 살 무렵 조부님 슬하에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하면서 교재로 썼던 5언절구집 『추구(推句)』의 첫 구절 ‘天高日月明’을 종횡으로 놓고 시구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天高日月明 高 ? ? ? ? 日 ? ? ? ? 月 ? ? ? ? 明 ? ? ? ? 물음표(?) 자리에 글자를 넣어 시구를 짜는 놀이다 ‘高山淸江長’ 둘째 구를 만들어 넣어 본다 天高日月明 高山淸江長 日淸 ? ? ? 月江 ? ? ? 明長 ? ? ? ‘日淸草葉靑’ 셋째 구를 억지로 짜 본다 天高日月明 高山淸江長 日淸草葉靑 月江葉 ? ? 明長靑 ? ? 그런데 마지막 구를 어떻게 메운다? 한참을 끙끙대다가 ‘月江葉舟行’ ‘달빛 어린 강위를 푸른 잎새 배가 흘러간다’ 시가 됐는지 어쩐지도 모르..

신작시 2021.12.15

치아를 염습하다

치아를 염습하다 임 보 어제 치과에 가서 몇 개 남은 영구치 중 두 개를 뽑아냈다 틀니를 건 동량재였는데 과로를 더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치과를 나오면서 간호사에게 발치한 두 이를 싸달라고 했더니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본다 한평생을 나를 위해 고군분투 헌신한 녀석들인데 그냥 버리고 갈 수야 없지 않는가? 비록 봉분이나 공적비는 못 세울지라도 곁에 두고 함께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진단이 담겼던 투명한 플라스틱 작은 원통 속에 안장하여 책상 곁에 모시다. ======================================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신작시 2021.12.05

가을은

가을은 임 보 하늘 깊이 끼룩끼룩 울며 날아가는 철새들의 비상― 시원하다. 붉게 익어 가며 맛이 깊어지는 과목 끝에 높이 매달린 과일― 향기롭다. 밤을 지새우며 어둠을 흔들면서 울어대는 풀벌레들의 소야곡― 왁자하다. 한가위가 가까워 오고 달이 만월에 이르는 밤 고향에 이르는 마음― 포근하다. 넓은 들판과 푸른 산을 가로질러 엉금엉금 이어달리는 전신주들의 질주― 늠름하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사이 몸을 불태우며 화살처럼 떨어지는 유성의 불빛― 신비롭다. 단풍 곱게 물들어가는 가을 산을 바라보며 멀리 있는 그대를 그리는 그리움― 그윽하다. ================================================= (jbc광장 2021년 9월)

신작시 2021.10.01

그냥 얻어지는 건 없다

그냥 얻어지는 건 없다 임 보 높이 매달린 과일이 먹고 싶으면 그 나무에 기어 올라가야 되고 초원을 달리는 짐승이 탐이 나면 창이나 화살로 사냥을 해야 하고 아름다운 이성을 얻고 싶으면 공을 들여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 세상에 그냥 되는 일은 없다 흘린 땀의 양만큼 얻게 된다. =================================== ------- 21년 가을호 권두시

신작시 2021.09.14

세 가지 은총

세 가지 은총 임보 경영의 귀재 마쓰시타 고노스케*에게 기자가 물었다 ‘당신의 성공 비결이 무엇인가?’ 빈곤(貧困) 허약(虛弱) 무학(無學) ‘하늘이 준 세 가지 은총’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가난했으므로 굶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했고 몸이 허약했기에 병들지 않으려 열심히 운동했고 배운 게 없으므로 알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 *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 내셔날, 파나소닉 회사를 세운 일본의 기업인. 초등학교 4학년 중퇴의 학력으로 세계적인 사업가로 성공함.

신작시 2021.08.26

작은 거인

작은 거인 임 보 134cm의 키를 가진 김해영*은 말했다 행복은 그냥 지나가지만 아픔은 다이아몬드처럼 남아 반짝인다고… 사람의 키는 몸의 길이가 아니라 생각의 깊이로 측정되어야 할 것 같다. ---------------------------------------------------------- * 김해영 : 척추장애인으로 14세에 가출. 독학으로 편물명장이 되어 아프리카 보츠와나의 편물학교 교장. 콜롬비아대학원에서 2013년 현재 박사학위 과정에 있음. ==========================================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신작시 2021.08.26

개좆대가리 / 임보

개좆대가리 임 보 전라도에서는 옛날 어른들이 반갑잖은 여름감기를 ‘고뿔’ 대신 ‘개좆대가리’라고 불렀다 천연두 같은 전염병은 ‘손님’‘마마’로 극진히 호칭을 하면서 왜 감기는 그렇게 비하했을까? 감기는 너무 잦은 반갑잖은 전염병이어서 그렇게 홀대를 해서 쫓아내려고 했던 것인가? 감기가 그처럼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아서 원래의 독기가 꺾여 무력해진 것은 아닐까? 코로나19 이놈의 이름도 ‘개좆대가리’로 바꿔 불러 보면 혹 힘을 잃게 되는 건 아닐지 모르것다! ------------------------------------------ * 21 시인협회 사화집 [포스트 코로나]

신작시 2021.07.06

부질없는 의문

/ 임보 샤워를 하다가 문득 가슴에 달린 두 개의 꼭지에 시선이 머물자 생각한다 ‘그것이 왜 거기에 달렸지?’ 조물주의 실수로 잘못 만들어진 건가? 아니면, 태초엔 남성도 수유(授乳)를 했다는 증거인가? 아니면, 언젠가는 남성도 육아의 기능을 갖게 되리라는 징조인가? 하기야 어떤 물고기*는 남성이 입 속에 새끼들을 담아 기르기도 한다고 하지 않던가?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 * 카디날피시라는 물고기의 수컷은 알과 새끼를 입속에 넣고 다니며 기른다고 함. =============================================

신작시 2021.06.25

싸부

싸부 임 보 내게서 몇 해 시를 들은 바 있는 나이가 좀 든 문하생이 있는데 술자리에서 내게 전화를 하면서 나를 호칭키를 ‘싸부’라고 한다 사부(師父)는 스승을 높여 이르는 말이지만 ‘싸부’는 좀 듣기 거시기하다 무슨 깡패집단의 우두머리 같기도 하고 무슨 주물공장의 화부 같은 느낌도 든다 아무튼 ‘사부’라고 호칭하기는 좀 민망하다는, 말하자면 별로 존경하고 싶진 않지만 마지못해 그렇게 부른다는 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도 같기 때문이다 “여봐, 그렇게 어렵게 부르지 말고 그냥 ‘선생’이라고 불러!”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그냥 그만두기로 한다 까다로운 ‘싸부’가 별 트집을 다 잡는다고 빈정거릴 게 뻔하지 않겠는가? 아니, 근본적인 문제는 내게 있겠다 싶기 때문이다. --------------------..

신작시 2021.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