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에 대한 한 보고 홍어(紅魚)에 관한 한 보고/ 임보 홍어를 자셔보았는가? 가오리처럼 생긴 넓적한 생선― 미나리 초고추장에 얼큰히 버무린 홍어회를 드셔보았는가? 콧등이 시큰하게 톡 쏘는 홍어의 맛을 보셨는가? 혹은 따끈한 홍어찜을 덥석 베물었다가 입천장이 훌렁 벗겨져 나간 홍어의 그 호된 맛을 보신 적이 있..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09.25
신발 신발/ 임보 무릇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제 나름의 신발들을 신고 있다. 배는 물의 신발 위에 있고 달은 구름의 신발을 달고 있는 셈이다. 지금의 차는 둥근 수레의 신발을 굴리며 단숨에 천 리를 달리기도 하지만 옛날의 가마는 사람의 어깨를 신고 하루에 백 리를 가기도 했다. 어떤 것들은 너무 크고 무..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09.24
단화(丹花) 단화(丹花)* 임보 진달래 꽃밭 이긴 화냥 노루 사향처럼 바닷속 천 년 묵은 침향목(沈香木) 슬픔처럼 먼 천사 나라의 옥적(玉笛) 가락처럼 뼛속까지 저며오는 사랑앓이처럼 내 코를 후벼드는 이 은은한 훈향(薰香) * 단화 : 이국종 훈향의 이름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09.19
동면 동면(冬眠)/ 임보 겨울 산은 눈 속에서 오소리처럼 웅크리고 잠들어 있다. 산의 체온을 감싸고 돋아나 있는 빽빽한 빈 잡목의 모발(毛髮)들 포르르르 장끼 한 마리 포탄처럼 솟았다 떨어지자 산은 잠시 눈을 떴다 다시 감는다.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09.18
혀 혀/ 임보 우리에게 입을 주시고 단단한 이빨들 사이에 부드러운 혀를 지으신 이여, 놀랍고 놀랍도다 날카로운 상하의 이빨 틈에서 먹이를 잘 씹도록 민첩하게 뒤척이며 씹은 먹이를 식도로 내려보내는 부지런한 노역자 입김을 굴리고 다듬어 번거로운 머리의 생각들을 자음과 모음의 음절로 정확히 ..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09.13
호수 호수/ 임보 호숫가에 앉아 호수를 들여다본다 물가의 갈대들이 물속에도 돋아나 있다 물속의 하늘을 배경으로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고 그 위를 구름도 흘러간다 새도 날고 낮달도 잠겼다 낚싯줄 끝의 낚싯대에 누가 매달려 있다 거꾸로 매달린 나 조용하고 깊은 세상이다 풍덩 개구리 한 마리 끼어들..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09.10
물의 소요 물의 소요(逍遙)/ 임보 공복의 아침, 지난밤 독주에 혹사당한 장을 달래기 위해 한 컵의 생수를 마신다 쪼르륵 내장으로 스며드는 시원한 냉수의 맛 수 억만 개의 물의 분자들이 혈관을 타고 이윽고 체내에 침투해 들어가리라. 한때는 바다에 머물었다가 한때는 구름 속 떠돌이었다가 한때는 소나기 방..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09.09
물의 칼 물의 칼/ 임보 대장간의 화덕에서 벼린 굳은 쇠붙이만이 예리한 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로 가슴을 베인 적이 없는가? 해협을 향해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의 모서리가 아니라 몇 방울의 물 두 안구를 적시며 흐르는 가는 눈물방울도 사람의 가슴을 베는 칼이 된다.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09.07
대우법 대우법(對偶法)/ 임보 ―꿈, 천국의 예감 빛을 모르는 장님은 평생 암흑(暗黑)의 꿈만 꾼다 그에게는 색(色)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소리를 모르는 먹보는 평생 암묵(暗黙)의 꿈만 꾼다 그에게는 음(音)의 세계가 닫혀 있기 때문이다 푸른 삷을 산 사람은 푸른 꿈을 붉은 삶을 산 사람은 붉은 꿈을 꾼다 ..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09.05
이별의 노래 이별의 노래/ 임보 녹기 전의 저 눈밭은 얼마나 눈부신가 지기 전의 저 꽃잎은 얼마나 어여쁜가 세상의 값진 것들은 사라지기 때문이리 사랑도 우리의 목숨도 그래서 황홀쿠나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