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없는 나라 거울 없는 나라/ 임보 거울이 없는 나라가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모른다 내가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남의 얼굴을 보고 내 얼굴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 나라에서는 언청이도 남이 미인이라 하면 미인으로 알고 미인도 남이 점박이라 하면 점박이가 된다 나는 내가 아니라 남의 ..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12.17
병력 병력(病歷)/ 임보 하루쯤 앓게 되면 육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한 열흘쯤 앓게 되면 목숨의 존귀함을 깨닫게 되고 한 달포쯤 앓게 되면 이 세상 삼라만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닫게 된다 앓아 본 적이 없는 자여, 어찌 삶의 깊은 맛을 짐작할 수 있으리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12.16
천국의 문 천국의 문(門)/ 임보 세상의 종말이 왔다 이 지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 하나씩만 가지고 저 세상에 가도록 허락했다 어떤 자는 무거운 황금 뭉치를 낑낑대며 지고 간다 어떤 자는 애인의 손을 잡고 시시덕거리며 간다 어떤 농부는 씨앗 주머니를 소중히 안고 가기도 하고 어떤 어부는 큰 그물을 메고 가..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12.12
갓스워드 「갓스워드」/ 임보 「갓스워드」는 1999년 12월 런던의 어느 초라한 고서점에서 프랑스의 한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 책이다 저자도 연대도 망실된 필사본인데 두 세기 전쯤 아일랜드의 한 박물학자가 쓴 것으로 발굴자는 추정했다 그 고고학자는 이 「갓스워드」를 읽고 한 달포쯤 실성한 상태였다 ..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12.05
간밤에 간밤에/ 임보 간밤에 천둥이 그리 설쳐 치더니 이 아침 물소리가 이리 사납구나 간밤에 숫부엉이 그리 울더니 이 아침 철쭉들이 이리 타는도다 간밤에 그리 달던 그대의 노래 이 아침 낮달로 서천에 뜨네 아, 간밤에 그리 붉던 내 꿈길은 이 아침 뉘 뜰에 어찌 피려는고?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12.03
벌들의 길처럼 벌들의 길처럼/ 임보 호박꽃에는 호박벌이 대추꽃에는 대추벌이 고추꽃에는 고추벌이 일러주는 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제 길을 알고 찾아든다 사람들도 말을 찾아 경마장으로 가는 놈 술을 찾아 객주집으로 가는 놈 밤이 되어도 걱정 없다 골목마다 불빛이 환하다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11.30
물의 세상 물의 세상/ 임보 남해 거문도쯤에서 한 40분만 바다로 달려나가 보면 이 세상은 뭍[陸]이 아니라 물[海]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상의 7할이 물로 뒤덮여 있고 바다의 깊이가 산들의 높이보다 더하니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지구(地球)가 아니라 수구(水球), 하나의 큰 물방울―푸른 수국(水國)이다. 거..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11.27
쓸쓸한 비결 쓸쓸한 비결(秘訣)/ 임보 이제껏 세상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죽음이 내 육신을 물어 뭉그러뜨린 뒤에도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내가 뿌린 문자의 씨가 한 톨이라도 이 지상에 남아 있는 한 나는 활자의 어두운 창을 열고 부활할 것이다 그리하여 선량한 사람들의 가슴속에 몰래 파고들어 곤충..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11.25
도둑처럼 도둑처럼/ 임보 딸깍 그대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소리도 없이 열리는 문(門) 그대는 없고 빈 방에 그대가 벗어 놓고 간 허물 같은 언어들만 남루하다 그대의 체온도 그대의 체취도 만질 수 없는 평면사각(平面四角)의 형광방 힐끔거리며 주위를 잠시 살핀다 <메모를 남겨 주세요>는 못 본 척 내 종..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11.23
사람을 찾음 사람을 찾음/ 임보 저 나그네 누구인가? 어디서 본 듯도 한 낯선 사내 머리는 세고 이빨은 다 무너진 채 오래 헤어졌다 문득 나타난 어린 시절의 친구 같은― 먼 길을 걸어온 듯 우수 어린 눈빛도 아프구나 아,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문득 이 아침 나를 내다보고 있는 거울 속의 저 사내. 임보시집들/눈부신 귀향 2009.11.09